"조직 위해 할 말은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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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경찰청 소속 현직 경찰관들이 14일 경찰공무원법 재개정안에 대한 헌법소원을 내기에 앞서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신인섭 기자

경찰의 이미지 한쪽엔 '짭새'라는 은어에 담긴 어두운 측면이 있다. 요즘은 4년제 대학 출신이 늘고 처우가 개선되면서 직업적 자부심을 가진 경찰이 많아졌다. 하지만 조직 문화가 바뀌면서 돌출.집단 행동 등의 부작용이 속출하고 있다. 14일 하위직 경찰들의 헌법소원 제기는 경찰의 지휘방침에 정면으로 도전했다는 의미에서 파장을 낳고 있다.

서울남부지검의 야간 당직 검사들은 요즘 피곤해졌다. 얼마 전까지도 경찰이 심야에 구속영장을 신청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자고 있는 당직 검사들을 깨우지 않는 게 관행이며 예의였다. 그러나 지난해 하반기부터 경찰이 한밤중에 영장을 들고 와 처리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검사들은 굳이 급한 사안도 아닌데 경찰이 의도적으로 골탕을 먹인다는 '심증'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규정대로 하자는 데야 어쩔 도리가 없는 실정이다. 요즘 경찰의 달라진 모습이다.

경찰 일부가 14일 경찰공무원법 재개정안에 대해 헌법소원을 내는 등 자기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내고 있다. 청와대.정치권.검찰.언론 등 과거의 성역에 대해서도 '할 말은 한다'는 기세다. 지난달엔 관악경찰서가 '유령당원'수사와 관련해 열린우리당 서울시당을 압수수색했다. 경찰이 집권 여당 당사를 압수수색하기는 처음이다.

일사불란했던 조직이 이완되면서 곳곳에서 돌출행동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초 경찰청에 근무하는 유모(36.경찰대 9기) 경감이 자신의 경찰 정모(正帽)를 노무현 대통령에게 소포로 보냈다. 지난해 시위 농민 사망 사건으로 허준영 당시 경찰청장이 사퇴하자 대통령을 상대로 불만을 표시한 것이다. 당황한 경찰 지휘부가 '돌출행동' 금지령을 내렸다. 하지만 금지령이 내려진 날 이번엔 서울 중랑서에 근무하는 김모(40) 경사가 경찰의 애환을 담은 자신의 책을 청와대에 등기우편으로 보냈다. 지휘부의 명령이 밑으로 전달되지 않고 있는 경찰의 단면이다.

경찰이 자기 조직의 이익을 확보하는 데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는 경향도 뚜렷해졌다. 경찰은 지난해 일선 경찰서나 지방청별로 국회의원을 초청해 검찰과의 수사권 조정 문제에서 도와 달라고 노골적으로 요청했다.

전.현직 경찰 모임인 '무궁화클럽'은 경찰 하위직 근속 승진 확대를 관철하기 위해 국회 행자위 소속 여야 의원들을 상대로 조직적인 로비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경찰 일각에선 "이러다 경찰에도 노조가 생기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30년을 근무한 서울 관내 경찰서의 한 수사과 간부(경위)는 "예전 같으면 꿈도 못 꿀 일이 현실에서 벌어져 정신이 없다"고 말했다.

◆ 신세대 경찰의 등장=요즘 경찰에 입문하는 세대들은 선배들과 사고방식이 다르다. 40대 후반의 한 경감은 "예전엔 상사의 말이 부당해도 고개 숙이며 살았지만 요즘 후배들은 비합리적인 지시라고 생각하면 즉각 반발한다"며 "검찰과의 관계에서도 이 같은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3년차인 한 순경은 "순찰을 전혀 돌지 않는 선배들이 있기에 '순찰을 같이 돌자'고 했더니 떨떠름해 하더라"며 "선배들은 '버릇없다'고 생각했겠지만 업무를 공평히 분담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신세대 경찰은 인권 의식이나 민주적 시민관도 뚜렷해 경찰이 과거의 어두운 이미지에서 탈피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직업의 자부심도 높다. 선배들도 이들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고 있다. 이 때문에 일선 현장에선 조직 문화 변화의 바람이 거세다. 회식은 줄었고 가급적 초과근무를 피하는 분위기다. 25년째 수사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한 경위는 "퇴근시간을 칼같이 지키려는 요즘 후배들을 보면 평범한 샐러리맨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동국대 곽대경(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사회 전반의 탈권위적 문화와 맞물려 나타난 현상"이라며 "선진국형 경찰로 가기 위한 진통이라고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정강현 기자<foneo@joongang.co.kr>
사진=신인섭 기자 <shini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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