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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엔 희망 없다” 아버지 ‘말실수’에, 4년간 꽃제비로 떠돌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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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꽃제비 시절과 북한에서의 경험을 쓴 책 거리 소년의 신발을 펴낸 이성주씨가 활짝 웃고 있다. [김춘식 기자]

꽃제비 시절과 북한에서의 경험을 쓴 책 거리 소년의 신발을 펴낸 이성주씨가 활짝 웃고 있다. [김춘식 기자]

“우리는 걸어서 도시를 빠져나왔다. 등 뒤로 노을이 내려왔고, 길은 점점 함경북도 어랑군의 구불구불한 진흙길로 변해갔다.”

『거리 소년 … 』 펴낸 탈북자 이성주씨 #“식량 훔치다 맞아 죽은 친구도 있어 #미국 가서 공부해 국제정치학자 꿈”

탈북자 이성주(30)씨가 쓴 『거리 소년의 신발』(씨드북·사진)의 일부 내용이다. 지난 1일 출간된 이 책은 그가 미국에서 낸 영문서 『에브리 폴링 스타』(Every Falling Star)의 한국어 번역본이다. 지난해 말 미국의 학부모협회가 선정한 ‘권장도서상’(비소설분야 은상)을 받아 현지에서 화제가 됐다.

‘별똥별을 보고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어릴 적 믿음을 떠올려 ‘별똥별’을 영문서 제목(에브리 폴링 스타)으로 붙였고, 닳고 낡은 신발로 꽃제비(거리를 떠도는 북한 노숙 아동) 생활을 하던 기억을 떠올려 번역본 제목(거리 소년의 신발)을 지었다.

이 책에는 북한 고위층 가정에서 태어난 이씨가 어린 나이에 가족과 흩어져 산전수전을 겪은 경험이 담겨 있다. 꽃제비로 4년간 생활한 그는 ‘일인칭 시점’으로 책을 썼다. 현장감과 현실감을 살리기 위해서다. “ ‘친구’를 ‘동무’로, ‘여행허가증’을 ‘여행증명서’로 바꾸는 등 북한식 언어를 최대한 살렸지요.”

4년간의 꽃제비 생활, 그리고 목숨을 건 탈북의 시작점은 북한 고위 장교였던 아버지의 ‘말실수’였다. 술자리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엔 희망이 없다”고 토로한 사실이 당국에 적발된 것이다. 평양에 머물던 세 식구는 함 북 경성으로 쫓겨났다. 이씨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부모는 “식량을 얻어 오겠다”며 11살이던 이씨를 남겨두고 떠났다. 그는 꽃제비 생활을 시작했다.

“경성을 떠나 또래 꽃제비 6명과 함경도 일대를 돌아다녔어요. 다른 꽃제비 무리와 싸우거나, 농장에서 식량을 훔치다 걸린 친구가 맞아 죽기도 했죠.” 4년간 동고동락 한 꽃제비들을 이씨는 ‘ 가족’이라고 칭했다.

이씨가 진짜 핏줄을 만난 건 15세 때다. “꽃제비 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온 경성역에서 우연히 만난 한 노인이 다가와 ‘외할아버지’라고 하더군요. 전 그 말을 안 믿었고, 꽃제비 친구들과 함께 그의 집을 털고자 그를 따라갔죠. 그런데 노인이 집에서 보여준 가족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진짜 제 할아버지였던 거죠. 손자를 만나기 위해 매주 일요일마다 역에 나와 있던 겁니다.”

한발 앞서 중국을 통해 한국으로 건너와 정착한 아버지의 주선으로 2002년 탈북한 이씨는 또래에 비해 3년 늦게 학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09학번으로 진학한 서강대 정외과를 3년 반만에 조기 졸업했고, 전액 장학금으로 영국 워릭대에 석사 유학도 다녀왔다. 이씨는 “『에브리 폴링 스타』를 쓴 건 2014년 캐나다 하원 인턴 경험으로 쌓은 영어 실력 덕분”이라고 말했다.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삶을 책에 담은 이씨는 내년 미국 유학을 떠날 계획이다. 현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해, 조지프 나이 같은 국제정치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언젠가 찾아올 통일에 대비해 남북한 사람들의 정서 차이를 줄여나가는 건 중요하다고 봅니다. 언젠가 마주할 어머니도 제 모습을 보고 기특해 하실 거라 생각합니다.(웃음)”

조진형 기자 enis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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