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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로맨틱했던 007, 로저 무어

중앙일보

입력

 배우 로저 무어(1927~2017)를 추모하며

'007 포 유어 아이즈 온리' 사진

'007 포 유어 아이즈 온리' 사진


글=김형석 영화저널리스트

로저 무어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89세. 처음 맞이하는 ‘본드의 죽음’이다. 사실 그는 뛰어난 연기파 배우도 아니었고 불멸의 열연을 펼치며 오스카 후보에 오르지도 않았다. ‘007’ 시리즈(1962~)의 제임스 본드라는 캐릭터를 가장 오랫동안 누리며 대중적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그는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숀 코너리에 의해 ‘옴므파탈’ 스타일로 탄생한 제임스 본드는 로저 무어를 통해 ‘로맨틱 가이’의 이미지를 더하며 비로소 완성되었고, 대니얼 크레이그가 등장하기 전까지 티모시 달튼이나 피어스 브로스넌은 모두 무어 스타일의 본드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코너리가 ‘007’ 시리즈에서 하차한 후 끝없는 변신을 통해 본드 캐릭터에서 멀어졌다면, 40대 중반에 본드가 되어 환갑 즈음에 그만두었던 로저 무어는 이후에도 여전히 본드 이미지 속에 있었다. 어쩌면 그는 본드가 되기 전부터, ‘세인트’(1962~69, ITV)나 ‘위장 게임’(원제 The Persuaders!, 1971~72, ITV) 같은 TV 시리즈로 스타덤에 올라 있을 때부터, 제임스 본드가 되기 위한 전초전을 치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첫 본드 영화인 ‘007 죽느냐 사느냐’(1973, 가이 해밀턴 감독)를 찍을 때부터 그는 능숙했다. 그에게 본드라는 캐릭터는 인생 그 자체였으며, 자연인 무어와 꽤 많이 닮은 존재였다.

미국 드라마 '세인트'의 한 장면

미국 드라마 '세인트'의 한 장면

1927년 런던에서 태어난 로저 무어의 어릴 적 꿈은 애니메이터였다. 열다섯 살 때부터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도제 수업을 받던 그는 실수를 저질러 그곳에서 쫓겨나 한동안 방황한다. 바로 그 무렵 놀라운 행운이 찾아온다. 경찰이던 무어의 아버지가 도난 신고를 받고 도착한 곳은 브라이언 데스몬드 허스트라는 영화감독의 집이었고, 아버지는 ‘훈남 아들’을 그에게 소개한다. 그 인연으로 출연한 첫 영화는 ‘시저와 클레오파트라’(1945, 가브리엘 파스칼 감독). 엑스트라로 로마 병정 역을 맡았다.
연기 경험은 전무했지만 큰 키에 출중한 외모를 지녔던 로저 무어는 가는 곳마다 여성들의 관심을 받았고, 이런 모습에 가능성을 발견한 허스트 감독은 무어의 후견인이 된다. 그를 왕립연극학교에 보내면서 수업료까지 내준 것.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에겐 빅 스타의 자질은 있었지만 명배우의 재능은 없었다. 이때 만난 위대한 극작가 노엘 카워드의 충고는 무어의 인생을 바꾼다. “젊은이, 자넨 놀라운 외모와 끔찍한 재능을 함께 지녔군. 앞으로 어떤 역할이든 제안이 오면 재지 말고 무조건 하게나. 만약에 두 역할을 동시에 제안 받으면, 고민하지 말고 돈 많이 주는 쪽으로 선택하고.” 무어는 배우 생활 내내 이 가르침을 잊지 않았고, 제임스 본드 역도 그렇게 맡게 된 캐릭터였다.

'007 나를 사랑한 스파이'의 한 장면.

'007 나를 사랑한 스파이'의 한 장면.

제2차 세계 대전 무렵 군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무어는 모델 활동을 하며 TV와 스크린에서 작은 역들을 전전하다 1954년 할리우드의 MGM과 계약을 맺는다.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공연했던 ‘내가 마지막 본 파리’(1954, 리처드 브룩스 감독)처럼 인상적인 영화도 있었지만, 이 시기 필모그래피는 다소 실망스러웠다. 이후 워너 브러더스로 소속을 옮기며 조금씩 알려지게 되었지만 돌파구는 할리우드가 아닌 영국에, 그리고 영화가 아닌 TV에 있었다. ‘세인트’에서 전 세계를 여행하는 백만장자로 등장한 무어는 스타덤에 올랐고, ‘위장 게임’에선 범죄를 해결하는 플레이보이가 된다. 이런 이미지는 이미 ‘무어식 본드’를 예견하는 것이었고, 사실 그는 시리즈의 첫 영화 ‘007 살인번호’(1962, 테렌스 영 감독) 때부터 본드 후보군 중 한 명이었다. ‘007 여왕 폐하 대작전’(1969. 피터 R. 헌트 감독)과 ‘007 다이아몬드는 영원히’(1971, 가이 해밀턴 감독)도 그에게 러브콜이 갔지만, TV 시리즈 일정 때문에 고사했다. 결국 그는 운명처럼 결국 세 번째 본드가 되었고, 46세에 첫 본드 무비 ‘007 죽느냐 사느냐’를 찍는다.

'007 죽느냐 사느냐'의 한 장면.

'007 죽느냐 사느냐'의 한 장면.

50년이 넘은 ‘007’ 시리즈의 역사는 몇 번의 위기를 겪는데, 로저 무어는 첫 위기에 등판한 특급 구원 투수 같은 존재였다. 숀 코너리가 하차 의지를 밝히고 뒤를 이을 적당한 배우가 없던 시기, TV 시리즈를 통해 강력한 아우라를 쌓은 그는 본드 역에 연착륙하며 본드 무비를 다시 상승 궤도에 올려놓았다. 1973년에 시작해 ‘007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1974, 가이 해밀턴 감독) ‘007 나를 사랑한 스파이’(1977, 루이스 길버트 감독) ‘007 문레이커’(1979, 루이스 길버트 감독) ‘007 유어 아이즈 온리’(1981, 존 글렌 감독) ‘007 옥토퍼시’(1983, 존 글렌 감독) ‘007 뷰 투 어 킬’(1985, 존 글렌 감독) 등 7편이 이어졌던 12년 동안 ‘007’ 시리즈는 월드 마켓에서 10억 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

'007 뷰 투 어 킬'의 한 장면.

'007 뷰 투 어 킬'의 한 장면.

더욱 중요한 건 본드 이미지의 변화였다. “내 개성은 숀 코너리나 조지 라젠비와는 완전히 달랐다. 나는 그들 같은 냉혈한 킬러 타입이 아니다.” 그는 심각하지 않은 본드를 창조했고, 액션에 서툰 대신 로맨스에 강했다. 그는 007 시리즈를 철저히 현실 도피적인 오락 영화라고 여겼고, 본드를 액션 영웅이 아닌 부드럽고 젠틀한 스파이라고 생각했다. 일부 매니어들은 무어가 시리즈를 연성화시켰다고 비난했지만, 블록버스터가 등장했던 1970년대 세계 영화계의 흐름 속에서 ‘무어의 본드’는 정답이었다. 무어가 총을 잡았던 시기, 영국적인 성격이 강했던 ‘007’ 시리즈는 전 세계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화려한 엔터테인먼트로 발돋움했고, 할리우드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프랜차이즈가 되었다.

'지옥의 특전대'의 로저 무어.

'지옥의 특전대'의 로저 무어.

이 시기 로저 무어는 ‘지옥의 특전대’(1978, 앤드류 V 맥라글렌 감독) 등의 영화로 변신을 꾀했지만 그는 여전히 본드 이미지 안에 있었다. 1994년 시리즈에서 하차한 후에도 그는 여전히 본드의 후광 안에 있었다. 하지만 이 시기 그는 새로운 삶의 국면을 맞이한다. 절친이었던 오드리 헵번의 권유로, 그녀의 뒤를 이어 유니세프 친선대사가 된 것. 가상의 세계에서 지구를 구했던 그는, 현실의 세계에서 빈곤 지역을 다니며 진정으로 세상을 구하고 가난한 아이들을 어루만지는 사람이 되었으며, 본드가 된 것보다 이 일을 “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는 일”로 여겼다.
늘 현장에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으며 친숙한 대화와 자기 비하적인 조크를 즐겼던 로저 무어. 그는 시대를 풍미했던 스타로서 휴머니즘의 가치를 실천했으며 죽기 직전까지 카메라 앞에 섰던, 진정 행복했던 연기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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