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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많은 고려 아리랑, 가까이서 천천히 바라본 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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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멀게만 느껴지는 ‘고려인’이라는 단어엔 민족의 아픈 역사가 담겨 있다. 일제강점기 생계를 위해 이국땅 연해주로 이주한 조선인들은 스스로 고려인이라 불렀다. 1930년 후반 스탈린 정부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으로 흩어져 집단 농장에서 일했다. 영화 학자이자 감독인 김소영은 오랜 시간 고려인과 같은 디아스포라를 연구해 왔다. 그의 시선은 고려인 거주 지역으로 순회공연을 다녔던 고려극장에 머물렀다. 다큐멘터리 ‘고려 아리랑:천산의 디바’(5월 25일 개봉)는 고려극장의 대표 디바 이함덕(1914~2002)과 방 타마라(74)의 삶을 좇는다. 여기엔 고려인 1세와 점차 다른 세계를 만들며 현재를 살아가는 2세, 3세가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석관동 캠퍼스에서 만난 김소영 감독과 방 타마라는 자매처럼, 가까운 친척처럼 자주 웃었다. 두 사람이 들려주는 고려인의 이야기를 전한다.
김나현 기자 respiro@joongang.co.kr

'고려 아리랑:천산의 디바' 김소영 감독, 방 타마라 인터뷰 #집단 농장에서 고된 노동했던 고려인 위로한 노래 #노동자, 여성의 시선으로 바라본 디아스포라

김소영 감독(왼쪽)과 고려인 가수 방 타마라 [사진=라희찬(STUDIO 706)]

김소영 감독(왼쪽)과 고려인 가수 방 타마라 [사진=라희찬(STUDIO 706)]

이 다큐는 망명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이다. 1부 ‘눈의 마음: 슬픔이 우리를 데려 가는 곳’(2014)(이하 ‘눈의 마음’)과 달리 음악이란 요소가 뚜렷이 드러난다.

김소영 “4년 전 ‘눈의 마음’을 찍을 때 고려극장에 갔는데, 옛 단원의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마치 사진에서 노랫소리가 나오는 듯했다. 사람이 흥얼거리듯 입을 열어 음을 만드는 순간을 좋아해, 늘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순간 고려인 여성 음악가 이야기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마침 국립 아시아 문화 전당의 이용우 선생이 아시아 디바 공연을 기획한다고 해 반가웠다.”

김소영 감독이 고려극장에 관한 작품을 만든다는 걸 어떻게 알게 되었나.

방 타마라 “고려극장의 지휘자로 은퇴한 한야곱에게 연락을 받았다. 한국에서 온 영화 제작진에게 고려극장 이야기를 해달라고. 장난치는 줄 알고 ‘이벤트라도 하려나’ 하며 나갔는데, 강진석 프로듀서가 내 젊은 시절 공연 영상을 보여주더라. 순회공연을 하다 집에 도둑이 많이 들어 남아 있는 사진과 영상이 없던 터라 신기하고 반가웠다.”

이 다큐에서 주인공으로 다루어 졌는데.

방 타마라“정말 몰랐다. 언제나 무대 위의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알 사람은 다 아는 빤한 이야기밖에 없을 텐데 하는 걱정이 들더라. 내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는 과정이 아주 재미있었다. 무엇보다 한국에서 우릴 찾아줬다는 것이 기쁘고 신기했다.”

이함덕 선생과 방 타마라 선생, 두 여성 예술가를 작품 전면에 세운 이유라면.

김소영 “시작은 이함덕 선생이었다. 그가 고려신문 등에 남긴 글을 읽었을 때, 순회공연 이야기가 무척 감동적이었다. 당시 고려인은 집단 농장에서 밤 10시까지 일하다, 고려극장의 공연을 보는 시간을 행복해했다. 삶의 고단함을 잊고 문화를 향유하는 것. 이건 예술의 근본적 역할일 것이다. 이후 방 타마라 선생이 활동한 아리랑 가무단의 영상을 보았는데, 노래에 반했다. 옛 노래를 재즈로 편곡한 점이 특히 좋았다. 나윤선의 음악을 듣다 ‘경’(2009)을 만들었을 정도로 재즈를 좋아하니까. 마치 1970년대 소비에트에서 나윤선을 만난 기분이었다. 고답적이지 않은 세련된 월드 뮤직 같았다.”
방 타마라 “가수로서 이야기하면, 러시아 전역을 상대로 가수 활동을 했었다. 러시아 노래, 우크라이나 노래, 고려 노래 모두 다른 마음으로, 다르게 불렀다. 고려극장 시절엔 한국과의 수교가 원활하지 못한 터라 한국 가요를 비밀리에 들었다. ‘어머니’라는 노래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원래 음악은 차분한 데, 고려인들이 듣고 부를 땐 훨씬 격정적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나 뿐 아니라 많은 고려인은 가족과 헤어진 애환을 갖고 있어서다. 안타깝게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 생각을 많이 하며 불러 큰 호응을 얻었다.”

방 타마라 선생은 당시 성악을 공부한 뮤지션이었다. 고려극장이 아니라 다른 소비에트 악단에서 노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방 타마라 “젊은 시절엔 모스크바, 체코 등의 악단에서 제안을 많이 받았다. 84년 색소폰 연주자인 남편과 함께 오케스트라를 꾸려 활동하기로 한 적도 있었다. 단원 100여 명을 모집하고 후원금을 받아 준비를 마쳤는데, 남편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 모든 게 물거품이 됐다. 당시 고려극장의 월급은 다른 극단 월급의 절반이었는데, 한국 문화를 이어가고 싶다는 대표의 뜻과 나의 상황이 맞물려 입단했다. 지금 생각하면 이곳에서 25년 간 노래할 운명이었던 것 같다.”

고려인 가수 방 타마라(왼쪽)과 김소영 교수 [사진=라희찬(STUDIO 706)]

고려인 가수 방 타마라(왼쪽)과 김소영 교수 [사진=라희찬(STUDIO 706)]

‘고려 아리랑’의 여정은 이함덕 선생의 궤적을 좇는 것으로 시작해, 현재 고려인 사회와 방 타마라 선생의 삶으로 이어진다. 여기엔 고려인 1세부터 2세, 3세의 모습이 잘 담겨있다. 흥미로운 건 세대가 바뀔수록 겉모습부터 생활 방식까지 아주 달라지는 점이다. 고려인이 아닌 사람과 결혼을 하고, 속한 국가의 영향을 받으면서 말이다. 이 작품에 큰 영감을 준 다큐멘터리 ‘고려사람’(1993, 송 라브렌찌 감독)엔 겉모습은 전형적인 우크라이나 사람이지만, 고려인 집에 입양돼 고려말을 쓰는 나이든 여성 마리아 꼬발렌토가 등장한다. 김소영 교수는 ‘고려 아리랑’을 촬영하다 그녀의 친딸을 만났다. “필연 혹은 작은 기적처럼”. 이 모녀의 이야기엔 그렇게 변모해온 고려인의 역사가 담겨 있다.

현재 고려인 사회를 어떤 시각으로 담으려 했는지 궁금하다.

김소영 “노동자, 농민, 여성 등 이른 바 하위주체(subaltern)에 속한 고려인들이 얼마나 다른 세상을 만들어 놓았는지 이야기하고 싶었다. 고려인 사회를 직접 들여다보면 3, 4세는 아주 다르다. 예를 들어 다문화, 다인종 사회를 지향하는 카자흐스탄에선 그에 맞는 세계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 마리아 꼬발렌토처럼 스스로를 고려 사람이라 생각하고 고려말도 유창하게 하는데, 인종적으로 전혀 고려인이 아닌 사람이 있다. 이를 바탕으로 현재 ‘하위주체의 세계주의’ 라는 학술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디아스포라 문제를 하위주체의 틀로 바라보는 것이다. 한국과 미국, 일본이 만든 냉전 이후 국가적 세계관으론 보이지 않던 문제를 선명하게 보게 됐다.”

방 타마라 선생이 손자에게 고려인 외증조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대목이 등장한다. 뿌리를 잊지 않겠다는 의지처럼 보이던데.

방 타마라 “지금 고려인의 현재와 과거를 젊은 세대가 정확히 인지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과거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가 서로 돕고 근면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지금까지 (고려인 사회가) 버티고 있다고 본다. 나의 뿌리를 부정한다면 어느 나라에 가며 적응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생에서 어떤 노력에 대한 보상도 받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김소영 감독이 여러 고려인과 친해지는 과정도 잘 담겨 있다.

김소영 “예전엔 다큐 속 대상과의 비판적 거리와 미학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2014년 ‘김 알렉스의 식당:안산=타슈켄트’부터 달라졌다. 철저히 출연자의 장소와 동선을 따라가 보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전문 통역 없이 고려인 사회의 도움을 받아 함께 지냈다. 매끄럽게 소통되지 않는 어려운 과정을 가감 없이 보여주려 했다. 이번 영화에서도 내가 고려말로 말을 거는데, 인터뷰이가 못 알아드는 장면이 나온다(웃음).”

결말이 흥미롭다. 방 타마라 선생의 딸이 등장해, 가수로 살아온 어머니를 향한 사랑을 이야기한다.  

김소영 “결말은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디아스포라의 여성은 이주와 결혼을 통해 새로운 삶을 꾸려 간다. 이들 삶엔 모성으로 만든 가족과 역사적 조국으로 존재하는 한국이 있다. 분리할 수 없다. 고려인 2세가 부르는 아리랑은 한국 전통 민요가 아니라 세계 민요의 형태인 것과 마찬가지다.”
방 타마라 “내가 바라는 건 고려인의 문화를 젊은 세대에 넘겨주는 것이다. 대단한 전통이나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음식처럼 일상적인 문화를 물려주고 싶다. 김치, 간장, 밥 같은 것들. 두 딸은 겉모습은 러시아 여성 같지만, 한국 음식을 잘 알고 있어 고려인 식당에 가면 주인이 놀라곤 한다. 딸들은 외모는 달라도 고려인이라고 한다. 내가 늘 밥을 해먹이었더니, 아직도 밖에서 빵을 먹고 집에 오면 ‘그건 끼니도 아니었다’며 꼭 밥을 찾는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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