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정수현의 바둑경영] 집단지성이 리더의 악수(惡手) 막는다

중앙일보

입력

리더의 독단적 의사결정 막을 장치 마련해야 … 프로기사는 나 홀로 연구보단 ‘공동연구’ 선호

리더가 누구냐에 따라 조직의 운명이 갈린다. 이것은 인간 사회의 큰 비극인 것 같다. 리더를 잘못 만나면 구성원은 고통을 받고 조직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운 좋게 리더를 잘 만나면 조직이 부강하게 되고 많은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다.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할 때 우리는 훌륭한 리더십을 발휘해 나라를 잘 경영해 주기를 기대한다. 회사의 대표가 새로 올 때도 역시 뛰어난 리더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많은 경우 기대는 실망으로 변한다. 리더의 장점보다 단점이 부각되며 리더십의 악수를 많이 두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권이 끝나갈 무렵이면 리더의 악수와 실수에 대해 비아냥거리기가 난무한다.

리더가 가장 흔하게 범하는 악수는 독단적인 의사결정이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과 고집을 밀어붙이는 것이다. 이렇게 할 경우 대체로 잘못된 결정을 하기 쉽다. 좋은 수가 숨어있어도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된다.

바둑의 고수도 엄청나게 많은 전문지식이 있음에도 때로는 잘못된 판단을 하고 크고 작은 실수를 한다. 그런데 조직의 리더는 바둑 고수처럼 깊은 내공을 쌓은 사람이 아니다. 바둑으로 치면 9단이 아니라 4단이나 그 이하의 실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자신의 생각을 밀어붙인다면 실수와 악수를 저지를 가능성이 클 것이다. 따라서 어느 조직이든 리더의 독단에서 오는 폐해를 줄이는 방안이 필요하다. 리더가 이상한 고집이나 신념으로 악수를 두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를 둘 필요가 있다. 그런 방법으로 프로기사들이 쓰는 ‘공동연구’ 방식을 소개해 보려고 한다.

바둑은 두 사람이 하는 개인 경기다. 바둑을 두는 대국자(對局者)는 기업의 경영자나 군대의 사령관과 같다. 하지만 이들은 외로운 리더다. 혼자서 전략을 세우고 실행을 해야 한다. 흑과 백의 바둑돌은 군대의 병사나 기업의 부하에 해당하지만, 이들과 전략이나 해결책을 상의할 수는 없다. 철저히 바둑은 개인적인 성격을 띠는 게임이다.

‘○○바둑연구회’ 같은 소모임 많아

이처럼 개인적인 게임임에도 프로기사들은 몇 사람이 모여 공동으로 연구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물론 혼자서 연구하기도 하지만 공동연구가 더 효과적이라고 본다. 그래서 ‘○○바둑연구회’와 같은 소모임을 구성해 바둑 수를 탐구한다. 한국은 물론 중국이나 일본에도 이런 바둑연구회가 여러 개 있다.

술꾼으로 유명했던 후지사와 슈코 9단은 젊은 기사들과 자주 연구회를 가졌다. 술이 덜 깬 상태에서도 그는 이 연구회에 가기 위해 신칸센을 타곤 했다. 후지사와 9단은 초반에 화려한 포석을 선보이는 경우가 많았고, 초반 50수는 그를 따라올 사람이 없다고 자타가 공인했다. 그러한 실력의 배후에는 젊은 기사들과의 공동연구가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바둑황제 조훈현 9단도 제1회 응씨배 세계대회에서 우승하기 전 젊은 기사들과 매주 연구회를 가졌다. 세계 강자들의 기보나 새로 나온 정석을 놓고 청년 프로기사들과 함께 분석한 것이다. 그 후 조훈현 9단은 응씨배에서 극적으로 우승하며 한국을 바둑 최강국으로 올라서게 했다. 이러한 조 9단의 쾌거에는 연구회의 분석이 분명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조훈현 9단은 왜 혼자서 연구를 하지 않고 다른 기사들과 공동연구를 했을까. 나 홀로 연구하는 것보다는 다른 전문가들과 함께 연구하는 것이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기사들은 홀로 연구하면 자신만의 독단적인 시각과 판단에 빠져 올바른 지식과 정보를 얻기 힘들다고 본다. 말하자면 ‘집단지성’이 개인의 지성보다 우월하다고 보는 것이다.

프로기사들의 공동연구회에서는 엉뚱한 아이디어도 자유롭게 피력할 수 있다. “혹시 이렇게 두는 수는 어떨까”라며 이색적인 대안을 얘기할 수 있다. 이런 엉뚱한 아이디어에서 새로운 묘수가 나오는 수도 있다. 혼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다양한 의견을 만날 수 있는 것이 공동연구의 장점 중 하나다.

엉뚱한 의견서 묘수 나와

간혹 엉뚱한 의견에 핀잔을 주는 일도 있다. 일본의 한 바둑연구회에서 젊은 기사가 비상식적인 수를 제시하자 선배기사가 “이 녀석아, 그런 수가 어딨어” 하고 핀잔을 준 적이 있다. 일본에 바둑유학을 간 한국 출신 기사가 알려준 것인데, 이런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창의적인 묘수가 있어도 비난을 피하려고 얘기를 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기업이나 국가의 리더가 회의에서 색다른 의견을 묵살한다면 참모나 부하들은 다시는 그런 의견을 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리더는 다양한 의견에 대해 개방적이어야 한다.

의견을 묵살하는 것이 어떤 폐해를 가져오는지 예를 하나 보자. 예전에 필자가 중국기원 초청으로 장수영 9단과 중일 천원전을 참관하러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중국의 천원 마샤오춘 9단과 일본의 천원 류시훈 7단의 바둑을 중국과 일본 기사 몇몇과 함께 검토했다.

[1도] 초반에 마샤오춘이 흑1에서 3으로 좌변에 큰 세력권을 형성했다. 백은 이 일대의 흑진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을 써야 할 것 같다.

[2도] 이 장면에서는 백1로 중앙에서 압박해 가는 것이 보통의 착상이다. 흑2에 받으면 백3으로 눌러 흑진을 제한하며 중앙에 두터움을 만든다. 그런데 이 진행은 좀 불만스러워 보인다. 좌변 흑집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3도] 그래서 필자는 다른 기사들에게 백1에 두면 어떨까 하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같이 연구하던 일본 기사는 고개를 저었다. 이 장면에서 그런 수는 생각하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검토할 가치가 없다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그때 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국의 바둑연구회에서는 어떤 수를 제시할 때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묵살하는 경우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설사 엉뚱한 수라고 할지라도 일단 검토해 보는 것이 연구회의 관행이었다. 나중에 검토한 바로는 필자가 제시한 수가 이 장면에서 일리 있는 수로 판명됐다.

공동연구는 다양한 의견을 모아 최선의 수를 찾으려는 것이므로 엉뚱해 뵈는 의견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이것을 묵살해버리면 리더가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프로기사들은 바둑 수에 관한 공동연구를 해 산출물을 내놓기도 한다. 충암연구회라든가 소소회 등 바둑연구회에서 연구한 수들을 모아 바둑잡지에 발표한다. 그것을 모아 책으로 내기도 한다. 기업이나 국가로 치면 전문가들이 토론하고 연구한 자료를 모아 정책자료집을 내는 것과 같다. 이 연구결과는 매우 유익하다. 그래서 외국 기사들도 한국기사들이 공동연구한 내용을 읽는다. 전문가들이 공동으로 연구해 내놓는 것은 믿을 만하다고 보는 것이다.

정수현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
1973년 프로기사에 입단한 후 1997년 프로 9단에 올랐다. 제 1기 프로신왕전에서 우승했다. 한국프로기사회장, KBS 일요바둑·바둑왕전의 해설자를 역임했다.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바둑 읽는 CEO』 『반상의 파노라마』 『 인생과 바둑』 등 30여 권의 저서가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