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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에 평창에 올 수 있었으면.." 지키지 못한 홀컴의 약속

중앙일보

입력

15일 평창 알펜시아 슬라이딩센터에서 훈련을 마친 뒤 만난 스티븐 홀컴. 평창=김지한 기자

15일 평창 알펜시아 슬라이딩센터에서 훈련을 마친 뒤 만난 스티븐 홀컴. 평창=김지한 기자

 '미국 봅슬레이의 영웅' 스티븐 홀컴(37)이 평창동계올림픽에 나서는 모습을 볼 수 없게 됐다.

7일 美봅슬레이대표팀 숙소서 숨진 채 발견 #62년만에 美 봅슬레이 올림픽 금메달 안긴 '영웅' #퇴행성 시력 장애 극복하고 올림픽 네 번째 출전 꿈 키워

미국올림픽위원회는 7일(한국시간) 홈페이지를 통해 홀컴이 이날 아침 미국 뉴욕주 레이크플래시드의 대표팀 숙소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고 전했다. 그는 2006년 토리노 대회부터 동계올림픽에 세 차례 출전했고, 2010년 밴쿠버 대회 때는 남자 4인승에서 62년 만에 미국 봅슬레이에 금메달을 안겼다. 스콧 블랙먼 미국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은 "모든 올림픽 가족들이 홀컴의 비보를 듣고 충격을 받고 슬픔에 빠졌다. 그는 훌륭한 선수이자, 훌륭한 사람이었다"며 애도의 뜻을 밝혔다.

유럽세가 강한 썰매 종목에서 북중미의 강국으로 꼽히는 미국엔 홀컴이라는 탁월한 간판 파일럿(조종수)이 있었다. 알파인 스키 선수를 하던 홀컴은 축구, 미식축구, 농구, 야구, 육상 등을 두루 경험한 다재다능한 스포츠맨이었다. 그러다 1998년 미국 봅슬레이대표팀 선발전을 통해서 푸시맨(4인승에서 2~3번째 순서로 앉는 사람)으로 봅슬레이와 첫 인연을 맺었다.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경기 전 트랙 상태를 점검하는 전주자를 경험하면서 올림픽 출전의 꿈을 키운 그는 2006년 토리노 대회를 시작으로 올림픽에 세 차례 출전했다. 세계선수권에선 4차례 우승했다.

홀컴의 성과가 더 빛난 건 그가 갑작스럽게 얻은 장애를 딛고 일어섰기 때문이다. 그는 선수 생활을 하던 2007년 선수 생활을 접을 뻔 했다. 갑작스레 퇴행성 시력 장애를 앓으면서 선수뿐 아니라 삶에도 치명적인 어려움을 겪게 됐다. 그는 한때 수면제를 먹고 자살 기도를 할 만큼 실의에 빠지기도 했다.

의사의 권유로 홀컴은 콘텍트렌즈를 눈에 이식하는 수술을 받았다. 실명할 수도 있는 위험한 순간을 넘긴 뒤 그는 피나는 노력으로 선수로서 재기에 성공했다. 그는 시각 대신 감각으로 조종하는 자신만의 조종법을 터득했다. 그리고 수술 1년 만인 2009년 2월 세계선수권 4인승에서 우승했고, 바로 이듬해 밴쿠버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까지 땄다. 2012년에 그는 '이제 나는 볼 수 있습니다(Now I can see)'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내기도 했다.

15일 평창 알펜시아 슬라이딩센터에서 훈련을 마친 뒤 동료들과 썰매 앞에 선 스티븐 홀컴(왼쪽). 평창=김지한 기자

15일 평창 알펜시아 슬라이딩센터에서 훈련을 마친 뒤 동료들과 썰매 앞에 선 스티븐 홀컴(왼쪽). 평창=김지한 기자

홀컴은 지난 3월 평창동계올림픽 테스트이벤트로 열린 봅슬레이 월드컵에 출전하기도 했다. 당시 기자와 만난 홀컴은 내내 싱글벙글했다. 그는 '챌린지(challenge·도전)'라는 단어를 수차례 쓰면서 트랙에 많은 흥미를 보였다. 그는 "연습이다보니 즐기면서 탔다. 모든 게 새롭고 재미있고 흥미진진했다"면서 "주행을 하기 전에 운동하는 '웜업(warm-up)' 공간도 깨끗했다. 좋은 경험이 됐다"고 말했다. 한국에 온 것도 처음이라는 그는 "사람들이 환상적이고, 음식도 맛있다. 즐기면서 보내고 있다"며 만족해했다.

"봅슬레이는 내 인생이다. 내 모든 것의 중심과도 같다"고 한 홀컴에겐 4번째 올림픽 출전이 될 평창 올림픽에 대한 꿈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그는 "내년 올림픽 때도 꼭 이 자리에 다시 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땐 무조건 우승을 목표로 달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김지한 기자 kim.jih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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