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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당신 오늘 유머 챙겼소 ?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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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링컨 시절 한 야당의원이 의회에서 링컨이 '두 얼굴을 지닌 이중인격자'라고 사정없이 공격해댔다. 이에 대해 링컨은 "내가 두 얼굴을 가졌다면 하필이면 이 못난 얼굴을 들고 여기 나왔겠습니까?" 이 한 마디로 링컨은 야당과 언론의 비판을 에둘러 갈 수 있었다. 명총리 처칠이 야당인 노동당의 끊임없는 국유화 요구에 시달릴 때였다.

화장실에서 노동당 당수를 만난 처칠은 모른 척했다. 왜 모른 척하느냐고 힐난하는 노동당 당수에게 처칠은 말한다. "당신은 큰 것만 보면 국유화하려 드니 내 걸 보면 국유화하자고 안 하겠소. 그러니 어찌 아는 척하리오." 이 정도면 가히 촌철살인(寸鐵殺人)의 경지다.

미국에서는 출근하면서 소지품을 챙길 때 "당신 유머 챙겼소?"하고 묻는다는 말이 있다. 유머야말로 곤경을 벗어나는 핵심 수단이라는 격언도 있다. 사상 최대의 정전사태가 벌어진 뉴욕에서 시민들은 전기보다 위대했다.

1977년 정전사태는 혼란 그 자체였는데 이번에는 완전히 다른 사건이었다고 뉴욕 타임스는 쓰고 있다. 짜증내고 화내는 시민들보다는 미소지으며 "이 참에 걷기대회 한번 하자!"는 시민들이 압도적이었다.

침착함.협력, 그리고 웃음이 시스템의 붕괴를 너끈히 메워 주었다. "뉴욕 시민은 자신들이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자긍심을 정전의 대가로 얻었다"고 워싱턴 포스트는 전한다. 전기 에너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람의 에너지인 것이다.

눈을 우리 사회로 돌려보면 얼른 '눈에 핏발이 서 있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주5일제, 부안 원전센터, 보수.진보 단체들의 광복절 집회, 대법원 판사 제청을 둘러싼 법원의 갈등에서 우리는 핏발 선 얼굴들을 본다. 여야는 물론 민주당 내 신구주류 간에도 험한 눈빛만이 오가고 있다.

이 와중에 대통령이 야당의원과 신문들을 향해 소송을 제기한 것은 그 의도가 무엇이든 우리 사회의 '핏발 지수'를 높일 수밖에 없다. 광복절 담론에서 국민 통합이 유달리 강조되었지만, 집안의 가장이 자신은 싸우는 모습을 보이면서 가족들보고는 화기애애하라고 충고한들 설득력이 있을까?

원론적으로 갈등이 있다는 것은 민주사회에서 자연스러운 일이다. 또 적절한 수준의 갈등은 사회를 발전시키는 동력이 된다. 하지만 임계점을 넘어선 갈등은 서로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잘해 보자는 '신바람'보다는 '두고 보자'는 억한 심정만 쌓일 수 있다. 더구나 도약인가 좌절인가 하는 이 예민한 시점에서 '투쟁 투쟁!'은 결국 사회의 혈압을 너무 높여 혈관이 터지게 할 수 있다.

복잡한 갈등의 조정 해법을 말하기 전에 우선 '얼굴근육 풀기'부터 하자고 권하고 싶다. 검은 안경을 끼고 상대를 보지 말고, 경직된 근육을 미소로 푸는 일부터 시작하자. 험한 말보다는 역설적인 유머가 상대를 설득하는 데 더 큰 위력이 있음을 믿어보기로 하자. 얼굴을 풀고 나면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역지사지(易地思之)가 가능해지고, 너그러움과 포용의 마음이 싹틀 수 있다.

이것이 전제가 돼야 협소한 이익을 넘어 전체의 이익을 생각할 수 있다. 사람들이 자신의 협소한 이익을 넘어 보편적인 이익을 중심으로 움직이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곧 진정한 '헤게모니의 정치'이고 '통합의 정치'인 것이다.

누가 솔선수범할 것인가? 대통령이다. 대통령이 먼저 웃는 얼굴을 보이고, 유머를 잃지 않는 의연함과 여유를 보여야 한다. 갈등 집단들에 대해 비판하기보다는 이들이 포용과 관용, 양보의 미덕을 발휘할 수 있도록 설득해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을 '히딩크 체질'이라고 했다. 히딩크의 가장 큰 장점은 선수들을 믿고 끊임없이 칭찬하면서 어떤 어려움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았다는 데 있다. 히딩크는 월드컵 8강 진출 후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고 너스레를 떨어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리고 "한국인, 당신이 최고야!"라는 말로 국민의 자긍심을 한껏 치켜세웠다. 히딩크 체질로의 개선, 여기가 바로 출발지점이다.

박 형 준 동아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