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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짧은 은발이 안 보이나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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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9호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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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와 일본 국교 수립 60주년 축하 행사에서 만난 나루히토 일본 왕세자(오른쪽).

말레이시아와 일본 국교 수립 60주년 축하 행사에서 만난 나루히토 일본 왕세자(오른쪽).

최근 일본과의 교류가 부쩍 늘었다. 오사카·교토 여행을 다녀온 것부터 일본 왕세자를 만난 것까지 모두 일본을 떼어 놓고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선후 관계에 따라 오사카 여행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할 것 같다.

이번 봄 일본 방문 목적은 흔히 생각하는 벚꽃놀이가 아니라 ‘한자 3000년’ 전시를 보기 위함이었다. 사실 벚꽃이 만개한 모습은 매년 어디서나 볼 수 있지만 전시는 다르다. 특히 이번처럼 대규모의 전시는 실로 보기 힘든 기회다.

전시품은 중국 각지의 박물관과 연구소 소장품으로 매우 다양했다. 갑골문, 상(商)·주(周)나라의 청동기, 한(漢)나라 때 쓰던 죽간과 목독 등등. 심지어 진(秦)나라 병마용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때는 마치 그때 당시 갱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번 전시를 놓쳤더라면 언제 또 이런 경험을 해볼 수 있겠는가.

그날 교토 당일치기 여행은 둘째 딸 세레나와 함께였다. 예전과 달리 지금은 어딜 가든 가족과 함께다. 가족들이 나 혼자 문밖으로 나서는 걸 불안해하는 탓이다. 멋진 동행과 함께 교토국립미술관으로 가는 발걸음은 가벼웠고 기대감에 마구 설렜다. 전시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지만 돌아오는 길은 순탄치 못했다. 퇴근길 러시아워와 맞물려 오사카로 돌아오는 기차는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을 만큼 만석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다 기차에 올랐지만 여전히 자리는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수술한 지 몇 달 되지 않은 회복 중인 환자 아닌가. 휴식이 필요했다. 열차 맨 마지막 칸에 가 보니 노약자 우대석 8석이 보였다. 역시 빈 자리는 없었다. 하지만 자격요건에 부합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할머니 한 분뿐 다른 7명은 모두 부적합해 보였다.

한 무리는 남매와 함께 있는 아주머니였다. 엄마와 남동생은 한창 숙면을 취하고 있었고, 나와 눈이 마주친 누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위해 자리를 양보할 만큼의 용기는 없었다. 그래, 다음 후보를 살펴보자. 그 옆엔 어여쁜 아가씨가 앉아 있었다. 하지만 스마트폰에 고정된 시선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걸 어쩐담. 그 옆에 단정하게 차려 입은 중년 남성은 기타를 들고 있었다. 그래, 이 남자라면 기꺼이 자리를 내어줄 것이다.

나는 일부러 그앞에서 모자를 벗었다. 이 짧은 은발이 보이는가.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중국어로 중얼거렸다. 그가 ‘우대석’이라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단 뭐라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 음악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벌써 6번째 실패다. 이쯤 되니 남은 두 사람은 자동적으로 포기가 됐다. 나는 실망감을 금치 못하고 딸 곁으로 돌아왔다.

30분쯤 서 있었을까. 점점 피로가 몰려왔다. 나는 원망이 가득한 목소리로 딸에게 속삭였다. 아니 어쩜 그럴 수가 있을까. 내 오랜 음악 경력에 비추어 봤을 때 동정심이 없는 사람은 감동적인 연주를 할 수 없어. 설사 그 음악이 좋다 한들 오래 갈 수 없다고. 결국 도태되고 말걸. 딸은 나를 위로했다. 엄마, 사람들은 엄마가 염색했다고 생각하나봐. 백발이 요새 유행이잖아. 누가 엄마를 60살로 보겠어. 엄마는 오히려 반문할 수도 있을걸. 내가 그렇게 늙어 보여요라고. 그러니까 엄마는 기뻐해야 하는 거라고.

말인즉슨 맞는 말이다. 역시 내 딸이다. 특히 엄마가 듣기 좋아하는 달콤한 말을 속삭이다니.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는 걸 막을 수가 없다. 그래, 이런 일도 쉽게 경험할 수 있는 건 아니야. 나는 기차를 잘 타지 않잖아. 바라기는 여든이 되면 외모와 실제 나이가 보조를 맞춰서 다른 사람들이 내게 양보할 때까지 서서 기다리지 않기를. 잠깐. 80살에도 기차를 탄다고? 뭐 어때. 안 될 건 없다.

불평을 늘어놓다 보니 어느새 원고가 가득 차 버렸다. 도량이 그만큼 넓지 못한 걸 어쩌겠나. 모두 내 탓이다. 일본 왕세자와 만남은 어떻게 됐냐고? 사실은 주말레이시아 일본 대사 초청으로 말레이시아와 일본의 국교 수립 60주년 축하 자리에서 만났다. 대사가 나를 가수 겸 연기자로 소개하자, 나루히토 왕세자는 평소에는 어떤 노래를 부르냐고 물었다. 나는 약간 당황했지만 이렇게 답했다. 저는 작곡도 해서 대부분의 노래를 직접 만들었어요. 언젠가 당신을 위한 노래를 부를 수 있길 바랍니다. 그러자 사교성 좋은 왕세자가 내게 되물었다. 물론이죠, 왜 안 되겠어요. 그 순간 나는 그에게 정말로 묻고 싶었다. 혹시 기타칠 줄 아시나요 라고.

천추샤 (陳秋霞·진추하)
라이언팍슨 파운데이션 주석
onesummernight7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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