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교수의 철학기행(6)엄정식<서강대교수·철학>보는 사람 없어도 달은 거기 있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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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사람들은 철학을 흔히 몽상가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쇼펜하워」 는 『이 세상을 한 바탕의 꿈이라고 여겨보지 않은 사람은 철학을 할 자격아 없다』고 까지 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철학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위대한 종교적 지도자도 많은 것을 보면 그러한 측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닌 듯 하다. 그러나 철학에는 전혀 다른 측면도 있다 .어떤 철학자들은 매우 현실적이어서 정치나 외교, 혹은 사업에 종사하기도 하고 수학자나 물리학자보다 오히려 더욱 치밀하고 실증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철학이 얼마나 폭넓은 학문인지를 나타내는 것이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가 지닌 인간성의 극단적인 두가지 측면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은 시대적 배경이나 철학자들의 기질에 따라 몽상적인 면과 실증적인 면 중에 어느 하나에 좀더 밀착된 현상을 보이게 되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중세의 철학자는 종교와 깊은 관계를 맺고 「저 세상적인 것」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지만 「러셀」과 같은 현대철학자는 수학이나 물리학에 더 깊은 관심을 갖고 「이 세상적인 것」의 의미를 규명하는데 몰두한다.
물론 예외도 있겠지만 이러한 사실은 중세가 종교와 신앙의 시대인 반면 현대는 과학과 기술의 시대임을 말해준다고 볼 수도 있다. 나는 얼마전 인디애나주의 노트르담 대학교에서 주최한 「과학철학 세미나」에 참석할 기회를 가졌다. 영국과 미국의 저명한 물리학자 및 철학자들이 초대된 이 회의의 주제는 「양자론이 철학에 미친 영향」 이었다. 현대 물리학자들에 의해서 발견된 물질의 미시현상들이 존재에 관한 철학자들의 궁극적 관심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를 점검하는 모임인 것이다. 원래 철학의 창시자인「탈레스」 이래로 철학자와 물리학자의 관심은 별로 다른 것이 아니었으나 「뉴튼」 이 거시역학을 완성시킨 이후 물질에 관한 연구는 철학에서 독립된 별개의 학문이 되어왔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 물리학자들의 연구가 점차 깊어지고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소립자들의 정체와 그 행태가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있는 책상이나 돌 등 사물들의 본질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밝혀냈을 때 마침내 철학자들은 상대성이론이나 양자론이 지니는 인식론적 및 존재론적 의미에 관해 깊은 관심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만약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어서 존재하는 사물들은 모두 상대적인 관계로서의 위치와 크기만을 가질 뿐이며 그것도 측정하는 주체와 측정되는 대상 사이의 상관관계로서만 의미를 지닐 뿐이라면 철학자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그토록 안타깝게 찾아오던 영원한 대상이나 절대적인 진리, 그리고 이에 관한 완전한 인식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발표된 논문들 중에서 가장 흥미있는 것은 코널대학교 물리학과 교수인 「머민」의 『보는 사람이 없어도 달은 거기 있는가』였다. 이 문제는 영국의 근대 철학자 「버클리」가 제기한 이래 아인슈타인이 양자론을 논박하기 위해 그의 동료에게 다시 물었던 그 순간까지 물리학과 철학의 중심과제 중에 하나였다. 「아인슈타인」은 달과 같이 객관적인 사물은 우리가 바라보거나 말거나 거기있다는 물리학적 설명을 제시하고 양자론은 물리적 세계의 완전한 서술을 마련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함이 있을 뿐 아니라 완성된 이론도 아니라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1964년「벨」은 「아인슈타인」 이 전제로 했던 빛의 절대성과 그의 결론이 서로 모순된다는 사실을 실험과 논증을 통해서 입증해냈고 이로 인해 양자론의 입장은 더욱 공고한 것이 되었다. 「머민」 교수의 논문은 매우 난삽한 소위 「벨의 정리」를 철학자들을 위해 알기 쉽게 다시 구성하고 그것이 함축하는 의미를 구체화하려는 것이었다.
양자론이란 간단히 말해서 관찰 그 자체가 관찰행위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속성을 만들어낸다는 이론이다.
좀 더 쉽게 말한다면 내가 어떤 사물을 바라볼 때 그것은 항상 내가 보기전과 다른 모습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보아낸 것은 결국 나에게 나타나기 이전의 그 사물이 아닌 셈이 된다. 이러한 이론이 어떤 시인의 『내가 네 이름을 부르기 전에 너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라는 시구를 설명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모든 물질의 세계를 구성하는 입자들의 행태에 관한 것이라면, 그리고 이것이「아인슈타인」조차도 논박할 수 없었던 진리라면 우리는 양자론이란 것에 대해서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된다.
인간은 누구나 나름대로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합리적인 사람들에게는 좀더 세련된 세계관이 있다. 철학적 세계관이라면 더욱 치밀하고 체계적이며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러한 세계관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양자론과 같은 객관적 사실에 관한 이론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철학자들이 「벨의 정리」에 관심을 나타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하나의 뇌자 알맹이에 빛 한줄기가 쏘인다는 것은 마치 초가집 한 채에 포격을 가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영향력을 미친다』는 「머민」 교수의 설명을 듣고 어떻게 이 이론의 의미를 무시할 도리가 있을 것인가.
그러나 철학자들이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성의 눈을 밝혀 물리학자들의 업적에서 깊은 의미를 찾아내려면 반드시 안정된 사회를 필요로 한다. 사회가 안정되어 있지 않으면 철학은 혼란의 와중에서 어느 편에 설 것을 강요당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작업에 급급해야 하기 때문에 이미 철학임을 그치고 한낱 궤변이 되고 만다. 이러한 궤변의 수렁에서 헤어나기 위해 철학자들은 종교로부터 피난처를 구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양자론의 인식론적 및 존재론적 의미에 심취해 있는 영미철학자들의 모습을 보고 그것은 안정된 사회의 철학자들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일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그러나 『대학』의 팔조목에도 나와 있듯이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평정하는 일 (치국평천하)도 사물의 본질을 깨달아 앎을 온전히 하는 것 (격물치지)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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