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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개헌투표 통과... 21세기 술탄 등극한 에르도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63) 터키 대통령이 ‘21세기 술탄'에 등극했다. 16일(현지시간) 치러진 터키 국민투표에서 개헌안이 통과되면서다. 그러나 찬반 표차가 미미한데다, 조작 시비까지 붙어 에르도안이 막강한 권한을 휘두르는 데 적잖은 갈등이 발생할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제 전환하는 개헌안 #찬성 51% 반대 49% 통과 #야당, 개표 조작 의혹 제기 #개헌으로 막강 권력 얻었지만 #에르도안의 터키 미래 불투명 #

터키 관영 아나돌루 통신에 따르면 이날 개헌 국민투표는찬성 51.32%, 반대 48.68%(개표율 98.2%)로 가결됐다. 투표 마감 직후 실시된 출구조사에선 찬성이 63%로 나타났지만, 개표가 진행되면서 격차는 좁혀졌다. 특히 양대 도시인 앙카라와 이스탄불에선 반대표가 찬성표를 앞질렀다. 

16일(현지시간) 개헌 국민투표가 실시된 터키에서 선거관리위원이 '반대'에 투표한 투표용지를 들어보이고 있다. [AP=뉴시스]

16일(현지시간) 개헌 국민투표가 실시된 터키에서 선거관리위원이 '반대'에 투표한 투표용지를 들어보이고 있다. [AP=뉴시스]

야당인 공화인민당(CHP)은 개표 중에 선거 조작 의혹을 제기했다. 아나돌루 통신이 개표율이 90%를 넘었다며 개표 현황을 중계 중인 가운데, 선거관리위원회는 투표함 60%만이 개표됐다고 발표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앙카라에 있는 에르도안의 정의개발당(AKP) 당사에선 선거 캠페인송이 흘러나오는 등 축제 분위기라고 영국 일간 가디언은 보도했다. 

이번 개헌 국민투표는 18개 항목을 대상으로 했다. 2003년 총리에 당선된 이래 11년을 재임한 에르도안은 4연임 금지 규정에 가로막히자 헌법을 바꿔 2014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이후엔 아예 대통령제로의 체제 변경을 추진해 막강한 권력을 손에 넣고자 했다. 

개헌안이 통과된 이상 에르도안은 2019년 11월 치러지는 대선에 출마할 전망이다. 만일 승리하면 5년 중임제 덕에 에르도안은 2029년까지 집권할 수 있다. 그의 26년 장기집권 구상이 현실화하는 것이다.


이번 개헌안의 핵심은 대통령의 막강한 권한이다. 에르도안은 의원내각제 탓에 허약한 연립정부가 꾸려지고, 과감하게 정책을 결정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대통령제로 바꾸면 단호한 의사 결정으로 터키를 안전하구 부강하게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과 프랑스 등이 대통령제의 예로 거론됐다. 한국도 모범 사례 중 하나였다.

하지만 에르도안의 대통령제는 지나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통령제 국가들이 갖고 있는 견제장치를 쏙 빼놨기 때문이다.
이번 터키의 개헌안에는 ^대통령은 의회를 해산할 수 있고 ^국가비상상태를 선포할 수 있으며 ^법원 고위직 인사권까지 갖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초법적 권한이다.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반이민 행정명령을 발동했을 때, 주 정부 판사는 제동을 걸어 감시와 견제의 역할을 다했다. 심지어 성문법에 이같은 내용이 적시되지 않은 영국에서도 총리는 매일 언론의 검증을 받는다. 매주 의회에서는 야당 당수와 정책에 대한 설전을 벌여야 한다.

더욱이 터키는 터키인과 쿠르드족, 그리스·아르메니아인, 유대인까지 함께 살고 있는 다민족 국가다. 종교와 인종도 다양해 승자독식 구도인 대통령제는 갈등을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특정 민족·인종 출신의 대통령이 다른 인종과 종교를 차별할 경우 걷잡을 수 없는 갈등이 예상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헌의 가장 큰 문제는 에르도안 본인이다. 그가 투표 전부터 독재자가 될 가능성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지난해 쿠데타가 실패한 이후 그는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권한을 남용했다. 5만 여명이 체포됐고 공무원 10만 명이 해고됐다. 이들 중 아주 일부만이 실제 쿠데타와 관련이 있다. 학자와 언론인·정치인까지 에르도안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체포됐다.

유럽 국가들은 이같은 에르도안의 횡포를 알고 있으면서도 속앓이를 해왔다. 터키가 가진 국제 정치 무대에서의 역할과 위상 때문이다.
터키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 중 단 둘뿐인 이슬람 국가다. 또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일을 하고 있다. 서방으로선 터키가 러시아의 품으로 들어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 시리아와 인접해 있어 극단주의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와 서방 연합군 간의 전쟁에서도 핵심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특히 내전에 휩싸인 시리아로부터 쏟아져나오는 난민들이 유럽에 닿기 전 수용해줄 나라가 터키다. 이민·난민 수용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유럽 국가들은 터키와 잘 협상해야만 한다. 이런 상황에서 무작정 에르도안을 비난만 하기는 어렵다.

터키의 개헌은 민주주의와 이슬람주의가 공존할 수 있는지 보여줄 가늠자도 될 전망이다. 에르도안은 개헌을 계기로 EU 가입을 재검토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번 개헌안에 사형제 부활이 포함돼 있어 이를 금지한 EU로의 합류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터키가 이란의 ‘수니파' 버전으로 변화하는 것은 중동과 나토 동맹국에 위협이 된다“며 “서방의 많은 국가가 에르도안이 독재를 감행할 경우 이슬람과 민주주의가 양립하기는 어렵다는 불행한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서울=홍주희 기자 sunt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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