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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재 예능 인기…'아재'는 죽지 않아, 다만 망가질 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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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뭉쳐야 뜬다' 18회 캡처.

JTBC '뭉쳐야 뜬다' 18회 캡처.

지난달 21일 방송된 JTBC '패키지로 세계일주-뭉쳐야 뜬다' 18회에서 싱가포르로 패키지여행을 떠난 정형돈은 이동 중인 버스 안에서 갑자기 가이드에게 묻는다. "지금 인도가 몇 시에요?" 당황한 가이드를 대신해 김성주는 신이 난 듯 답한다. "나는 아는데, 네시. 인도네시아."

아재 전성시대, 지난해부터 꺼지지 않는 인기 #"아재와 개저씨 사이 줄타기가 관건"

수시로 트렌드가 바뀌고 신조어가 등장하는 요즘에도 꾸준히 인기를 끄는 감성이 있다. 촌스러우면서도 뻔뻔한, 바로 '아재' 감성이다. 아재란 '아저씨'의 낮춤말이지만, 젊은 층에선 '친근한 아저씨'를 일러 아재라는 애칭을 붙여주고 있다. 지난해 중순 시작된 이 '아재 감성' 열풍은 대중문화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굵직한 키워드가 됐다.

◇대중문화에서 빠질 수 없는 아재감성

특히 최근 예능프로그램에선 '아재 감성을 건드려줘야 시청률이 올라간다'는 얘기까지 있다. 최근 7주간의 휴식을 끝내고 돌아온 MBC '무한도전'은  멤버들간 팀을 나눠 대결을 펼치는 '하나마나 대결'로 돌아왔다. 대결종목은 오락실 대표 게임 '스트리트파이터', 고전적 보드게임 '브루마블', 동호회 스포츠 인기 종목 '볼링', '축구' 등 대부분 옛날 감성을 떠올리는 게임들이었다. 10대와 20대 사이에서 '핫'한 슈팅게임 '오버워치'도 대결 종목으로 꼽았지만, 웃음은 오버워치 자체보다는 '신문물'을 접하며 고전하는 아재 멤버들에게 터져 나왔다.

무한도전 하나마나 대결 [사진 MBC]

무한도전 하나마나 대결 [사진 MBC]

특히 JTBC는 '아재 감성'을 내세운 예능으로, 연이은 히트를 치고 있다. JTBC '패키지로 세계일주-뭉쳐야 뜬다'는 자유여행이 보편화된 21세기, 20세기 여행방식 '패키지여행'을 끌고 들어왔다. 멤버들도 정형돈(39)·안정환(41)·김성주(45)·김용만(50) 모두 아재들로 채워져 있다. 특히 제일 나이가 많은 큰 아재 김용만은 '옛날 스타'의 모습을 보여주며 인기를 끌고 있다. '관찰' 예능 형식임에도 불구하고 카메라를 자꾸 의식한다든지, '오디오'의 빈틈을 참지 못하고 아무 말이나 쉴새 없이 얘기하기도 한다. 나머지 출연자들도 수시로 아재 말투와 아재 개그를 선보인다.

지난달 14일 방송된 13회 '스위스' 여행편에서는 정형돈 대신 함께한 아이돌 '윤두준'까지 아재들에게 물 들어 "땡큐요오~", "걸렸다아~"와 같은 아재 말투를 자신도 모르게 내뱉기도 했다. JTBC '아는 형님'과 '한끼 줍쇼'도 마찬가지다. '아는 형님'은 강호동과 이수근, '한끼 줍쇼'는 이경규와 강호동 등 '아재' 중심으로 풀어나간다. 심지어 tvN은 31일 예능 '시간을 달리는 남자(시달남)'를 통해 '아재 감성'을 아예 중심 테마로 불러들였다. 아래는 '시달남'의 시놉시스다. 시놉시스 그대로 젊은이들의 지식에 도전하는 '아재들의 퀴즈쇼'다.

"여섯 명의 아재들이 펼치는 오빠 감각 찾기 프로젝트. 마음만은 언제나 젊은 오빠이고 싶은 아재들의 오빠 따라잡기 퀴즈쇼. 오빠와 아재 사이 ‘시간을 달리는 남자’"

tvN '시간을 달리는 남자' [사진 tvN]

tvN '시간을 달리는 남자' [사진 tvN]

지금 중년은, 이전 중년과는 다르다

꺼지지 않는 '아재 감성'의 열풍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아재'들에 대한 파악이 중요하다. 아재들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지금의 30대 후반과 40대는 예전의 '중년'과는 사뭇 다르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장점은 '소통' 능력이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지금의 40대는 90년대 시작된 인터넷 문화를 10대, 20대 때 겪은 사람들이다. 디지털 감성에 열려 있는 거다. 그러면서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얻는 아저씨 감성, 즉 아날로그 감성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뿐 아니다. 90년대 중반까지는 민주화 등 정치 이슈가 핫했고, 97년 IMF 이후에는 경제 이슈에 다들 목매게 됐다. 그런데 40대는 이 두가지를 모두 경험하면서 두 세대를 아우르며 이해할 수 있는 세대다."

즉, 특정 세대에 갇혀 있지 않고 열려 있는 유연성이 보편적으로 소비될 수 있는 웃음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얘기다. 실제 '아재'들은 권위를 내세우지도, 망가지는 걸 두려워 하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아는 형님'에서 천하장사 출신 강호동(47)은 민경훈(33)의 '가소로운' 날라차기에도 겁 먹은 척하며 망가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무한도전'의 맏형 박명수도 동생들 사이에서 '동네북'이 된 지 오래다.

JTBC '아는 형님' [캡처 JTBC '아는형님']

JTBC '아는 형님' [캡처 JTBC '아는형님']

◇죽지 않는 '아재 감성', 왜?

'아재 감성'은 앞으로도 한동안 계속해서 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유는 두 가지다. 시장적인 측면과 콘텐트적 측면.

우선 '시장'에서도 아재 감성을 부르고 있다.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에 익숙해진 젊은 세대들이 TV를 보지 않으면서 상대적으로 아재 시청자들의 입김이 커졌다. 여전히 TV 시청률에 목 맬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입김이 커진 아재들을 위한 콘텐트는 계속해서 소환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지금의 아재들은 열려 있는 '트렌디'한 아재들이니 콘텐트도 '아저씨'들을 위해 굳이 '후지게' 만들 필요도 없으니 '꿩 먹고 알 먹고'다.

이번 분석은 좀 슬프다. 대중문화의 소비층이 20대로 확장되지 않는 탓도 '아재'들을 위한 콘텐트를 계속해서 소환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김교석 대중문화평론가는 "졸업과 취업은 늦어지고 취업해도 살기가 팍팍한 현실이다. 그만큼 20대가 대중문화 소비 주체로 서기 어렵다. 문화 전반에서 3040세대들의 추억을 자극하는 '복고 열풍'이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이유다"라고 분석했다.


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는 "대한민국은 압축 성장과 변화가 굉장히 심한 사회로, 약간의 세대 차이에도 느끼는 경험과 감성이 모두 다르다. 이때문에 복고감성이 아재들은 '노스탤지어'를 느끼고, 젊은 세대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신기해하고 흥미로워해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잠깐 각 방송에서 보여준 '아재 감성'의 예를 소개하고 간다.

◇주요 아재 개그

MBC '무한도전'


축구 대결 앞두고 유재석이 "내 슛 때문에 친구 배에 아직까지 자국이 찍혀있다"고 말하자 정준하 "볼 트래핑 하며 걸어가다 임진각이 나왔다"고

MBC라디오 '오후의 발견-아재아재 우리 아재' 사연


머리가 심하게 벗겨진 아버지, 부엌에 켜진 불을 보고 "내가 있는데 불을 왜 켜. 지금 당장 한전에 전화해, 우리 집은 전기 필요 없다고."

JTBC '아는 형님'

한 여성 출연자가 '털기춤' 잘한다고 하자 이수근, "나는 다른 걸 잘 턴다"며 집 주소를 말하며 "신상털기" 외쳐

'신상털기' 선보이고 있는 개그맨 이수근 [캡처 JTBC '아는형님]

'신상털기' 선보이고 있는 개그맨 이수근 [캡처 JTBC '아는형님]

◇아재가 '개저씨' 되는 순간, 위기는 찾아온다

하지만 어느 지점에나 위기 포인트는 있다. 아재 감성의 위기는 그 아재와 '개저씨'의 경계에 숨어 있다. '개저씨'란 개와 아저씨의 합성어로, 상식적으로 용인되는 선을 넘어 행동하는 아재들을 지칭하는 용어다. 특히 그 경계가 드러나기 쉬운 영역이 '젠더(사회적 성) 영역'이다. JTBC 아는형님의 애청자인 이모(30·여)씨는 "가끔 아·형을 보다 깜짝 깜짝 놀란다. 어린 여성 출연자를 불러놓고 '뽀뽀'를 노골적으로 요구하거나 여성의 신체 특정 부위의 크기를 놓고 반복해 암시할 때는  보기가 너무 불편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7월 KBS 2TV '해피선데이-1박2일'의 이화여대 편에서도 가수 '데프콘'은 주위 여대생들을 보며 "꽃들이 움직인다. 꽃들이 말을 해!"라고 말해 "예쁘지 않은 여자는 여자도 아니냐"는 문제제기를 들어야 했다.

'아재들'은 이 젠더(성·性) 문제에 취약하다. 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커피 타 오는 여직원의 엉덩이를 사장이 찌르고 태연하게 웃어넘기는 장면이 개그 코너에 자주 등장했다. 남편에게 잔소리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여준 뒤 갑자기 화면이 전환되면 아내의 눈 주위가 퍼렇게 돼 있는 모습도 개그 코드로 활용됐다.

이 왜곡된 젠더 영역이 21세기로 넘어오며 급변했다. 이문원 평론가는 "예전에는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웃음 코드지만 왜곡된 성 인식을 담은 내용이 많았다"며 "변화하는 성 인식을 따라잡지 못한 순간 아재는 개저씨로 전락할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한 경계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노진호 기자 yesn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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