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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리셋 코리아

해외 첨단인력 끌어들이게 기술창업비자 벽 허물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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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신통상정책으로 4차산업혁명 이끌자 

말레이시아 쿨림 첨단산업단지

말레이시아 쿨림 첨단산업단지

세계 첨단산업의 메카인 미국 실리콘밸리. 이곳을 찾는 방문객이라면 하나같이 놀라는 사실이 있다. 이곳에서 일하는 첨단 인력의 근 절반이 외국 출신이라는 점이다. 2015년 현재 45%가 해외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다. 첨단 분야 내 외국인들의 활약이 두드러진 곳은 실리콘밸리뿐이 아니다. 스타트업 업체 내 외국인 비중이 53%에 달하는 런던을 필두로 싱가포르(52%), 베를린(49%) 역시 해외 인재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다.

리셋 코리아 통상분과 제안 #비자 까다로워 3년간 발급 20건뿐 #제품·서비스처럼 인력도 FTA를 #FTA에도 일부 수입품값 비싸져 #중간 유통업자가 이익 더 챙긴 탓 #국민에 실익 주게 통상정책 보완을

이렇듯 해외 인재를 끌어모으는 한편 세금 감면 등 온갖 혜택을 주면서 첨단산업을 육성하는 것은 선진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오래전 제쳤다고 여기는 동남아 국가도 집약적인 노력으로 큰 성과를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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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적인 사례가 말레이시아에 자리 잡은 ‘쿨림 첨단 산업단지(Kulim Hi-Tech Park)’다. ‘동남아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이곳은 해외 인력에 대한 융통성 있는 이주·취업정책 등으로 나날이 커 나가고 있다.

우리는 어떤가. 한국에서 취업비자를 받은 외국인들의 경험담을 들으면 끔찍하기 짝이 없다. 기술창업비자(D-8-4)를 받으려면 국내에 회사를 세우고 사업자 등록을 끝내야 한다. 여기에 지식재산권 보유 및 출원, 발명·창업대전 수상 등 까다로운 조건도 만족해야 한다.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기술창업비자를 받은 경우가 20건에 불과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 때문에 리셋 코리아 통상분과 위원들은 “첨단산업, 특히 최근 화두로 떠오른 4차 산업혁명을 위해서는 이 같은 인력 이동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제 통상정책이 제품과 서비스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는 데에서 발전해 첨단산업 육성과 같은 정책 수단으로 적극적으로 활용돼야 한다는 것이다.

열띤 토론 끝에 위원들이 추려낸 신(新)통상정책의 핵심 과제는 세 가지였다. 첫째 국민의 이익, 둘째 첨단산업 발전, 셋째 개도국 지원에 도움이 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선 국민의 이익에 도움이 돼야 한다는 의견은 그간에 추진된 통상정책의 과실이 국민들에게 제대로 돌아가지 않은 때가 많았다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이를 두고 분과장인 김현종(전 통상교섭본부장) 한국외대 교수는 “자유무역협정(FTA) 체결로 관세가 인하됐는데도 와인 등 여러 품목의 가격이 떨어지지 않았다”며 “누구를 위해 FTA를 하는지 자문하게 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한·칠레, 한·미, 그리고 한·유럽연합(EU) FTA를 막론하고 발효 후 싸질 걸로 기대됐던 품목 중 상당수가 비싸진 것으로 나타났다. 예컨대 칠레산 포도주 몬테스 알파는 관세율이 12.5%에 달했던 2004년에는 3만8000원이었던 게 관세 한 푼 안 내게 된 2009년에는 4만7000원으로 올랐었다. 미국산 오렌지주스·맥주 등도 마찬가지로 관세가 떨어졌는데도 가격은 뛰었다. “이는 중간 유통업자들이 관세 하락 폭 이상으로 가격을 올린 결과로 이 같은 파행은 막아야 한다”고 위원들은 말했다.

자유로운 인적 교류를 통한 첨단산업 육성도 통상정책 차원에서 촉진돼야 한다는 방안도 제시됐다. 4차 산업이 성장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요소는 바로 지식이다.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의 최첨단 지식을 이 땅에 가져오기 위해서는 해당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을 불러들이는 게 최선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김범수 KL파트너스 변호사는 “헬스케어·바이오 등 최첨단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이 분야에서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인재들이 한국에서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김 변호사는 “국내외에서 공부한 외국인 인재는 물론 한국과 인연이 없는 해외 전문가라도 우리의 4차 산업혁명에 어려움 없이 진입할 수 있는 프레임을 만들어 통상정책에 반영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데이터 국경이동 금지 풀어야 미래산업 발전

김흥종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선임연구위원은 “4차 산업혁명, 스마트 팩토리 육성을 달성하려면 주변국들과 함께 갈 수밖에 없다”며 “주변국과의 디지털 단일 시장 구축 및 인적 이동 장려 등을 통해 산업과 통상정책을 연결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송영관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이 강조한 대목은 데이터 이동에 대한 규제 완화였다. 송 위원은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은 데이터지만, 현재 데이터의 국경 간 이동은 금지돼 있다”며 “인력과 함께 데이터의 자유로운 이동을 막는 규제를 풀어줘야 미래 먹거리 산업이 발전한다”고 지적했다.

끝으로 형편이 어려운 개발도상국을 통상정책을 통해 지원하는 방안도 적극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김종범 연세대 교수는 “옛날에는 선진국들이 경제 원조 등으로 가난한 나라를 도왔지만 이제는 FTA를 맺어 후진국 특정 분야의 발전을 돕는 방법을 쓴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개도국과 FTA를 맺을 때는 효율적으로 일을 추진해야 한다는 방안도 제시됐다. 가급적 많은 나라와 통상협정을 맺는 게 좋지만 그렇다고 경제 규모가 작은 나라와의 협상에 너무 힘을 빼선 안 된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FTA 협정의 기본 틀을 만들어 상대 국가에 맞게 수정하면 업무가 훨씬 간편해질 것”이라고 조언했다.

개도국 지원하는 통상정책 적극 검토해야

한편 신통상정책의 실행 방안으로 제시된 해외 인력의 이주 허용에 대해 중앙일보의 온라인 시민 수렴 사이트 시민마이크(peoplemic.com)에 글을 올린 시민들은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다양하고 우수한 인력은 향후 우리나라의 경쟁력 제고 및 기술산업 발달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특히 첨단 분야 인력에 대해서는 “우선적으로 이민을 허용한 후 점차 그 문호를 개방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식의 의견이 나왔다. 심지어 “이미 세계화된 시대에 살고 있는 마당에 허용할지 말지를 이야기하는 게 별 의미가 없다”는 반응도 있었다.

반면 첨단 해외 인력이라고 해서 이민자 문제를 무시해선 안 된다는 반대도 적지 않았다. “‘첨단’이란 단어에 현혹돼선 안 된다”며 “미국·캐나다·프랑스·독일 등이 이민자들을 받아들여 어떻게 됐는지 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남정호 논설위원 nam.jeongh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