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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콘·소시지 안주라도 좋아 ‘ 잠시 동안 우린 물결 속에서’취했다.

중앙일보

입력

푸드 스타일리스트 김민지의 ‘물결’

 DIY제품과 독특한 소품들로 꾸며진 실내는 핑크빛 조명 때문에 따뜻하면서도 묘한 분위기를 낸다.

DIY제품과 독특한 소품들로 꾸며진 실내는 핑크빛 조명 때문에 따뜻하면서도 묘한 분위기를 낸다.

을지로 노포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다 ‘딱 한 잔만 더’를 외칠때 일행 중 한명이 말했다. “아무도 모르는 술집 한 번 가볼래?” 추운 겨울밤 종종 걸음으로 을지로 3가, 그 익숙한 곳에 섬처럼 숨은 술집을 찾았고 그렇게 ‘물결’을 만났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 속 한 구절을 옮긴 네온 조명.

알베르 카뮈의소설 '이방인' 속 한 구절을 옮긴 네온 조명.

건물 밖으로는 간판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핑크색 조명이 새어나오는 창이 있을 뿐. 이 안이 궁금하면 한 번 와보라고 신호를 보내듯 번지는 희미한 빛은 무척 매력적이었다. 꼬불꼬불 가파른 계단을 여러 번 오르락내리락 했다. 좁은 입구, 여러 갈래 통로 사이에서 헤매다 비밀 정원의 표식인 듯 4층으로 올라가는 길을 발견했다. 물결사진 위에 흰색으로 단정하게 쓰인 두 글자 ‘물결’. 문에 붙은 포스터는 참 얌전했다. 반전의 묘미는 문이 열리고 시작됐다. 몽환적인 조명과 일렁대는 사이키, 아기자기한 소품들, 에어플랜트와 어항이 뒤섞여 있었다. 핑크빛 타이포 네온 조명이 ‘잠시 동안 우리는물결 속에서’라고 반짝였다. 매력적인 외모의 앳된 주인장이 살포시 웃으며 우리 같은 취객을 반겼다. “어서 오세요.” 공예를 전공했다는 주인장은 작업실 겸 마련한 장소라고 안내했다. “그냥 물결이 좋아서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 속 한 구절로 네온 조명을 만들어봤어요.”


테이블도 모두 자체제작인데 박스 형태다. 그 안에 흰 돌과 모래를 깔고 에어플랜트와 불가사리인듯 파란 펄이 반짝이는 별모양 종이를 넣고 유리로 덮었다. 플리마켓도 진행한다더니 아기자기한 소품과 액세서리 및 디자인 제품도 여럿 눈에 띄었다. 사뿐사뿐 걸어 다니며 사소한 질문에 조근 조근 답해주는 주인장의 매력에도 심쿵. 

       불 없이 인스턴트 식품과 전자레인지로만 조리하는 ‘물결’ 안주 메뉴들.

불 없이 인스턴트 식품과 전자레인지로만 조리하는 ‘물결’ 안주 메뉴들.

얼마 후 요리하는 후배를 데리고 또 찾아갔다. “너 진짜 깜짝 놀랄 걸” 난 호언장담했고, 역시나 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후배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이 날이 맨 정신으로 처음 메뉴판을 살펴본 날이다. 팝콘·짜파게티·소시지·라면 등등이 적혀 있다. 음식 만드는 데는 공 들이지 않고 충실히 맥주만 팔겠다는 구성이 너무 귀여워서 웃음이 터졌다. 주인장의 작은 주방에는 아예 불이 없다. 모든걸 전자레인지만으로 뚝딱뚝딱 그럴싸하게 조리해낸다. “군대 다녀온 남동생에게 배웠다”며 ‘봉지짜장’을 내놓는데 한 마디로 미술적이었다. 까맣게 윤기 흐르는 짜장 위에 하얀 달걀 반숙과 하얀 마요네즈가 얹혀 색 대비를 이뤘다. 달걀은 노른자까지 적당하게 익은 수란 형태로 나름 제대로 만든 요리였다.


사실 마요네즈는 마법의 소스다. 무엇과 먹어도 맛이 없을 수가 없다. 세상에는 그런 소스들이 있다. 굴소스·칠리소스·라면스프 같은. 건강하지 못한 음식으로 주목받는 소스들이지만 무조건 비판적으로 몰아세울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영양학적으로 완벽하고 조리기술까지 훌륭하며 플레이팅마저 황홀한 한 접시보다 ‘썸남’과 끓여 먹는 해장라면 한 그릇의 만족이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드는 것을 부정 할 수 없다. 그렇다고 ‘물결’을 맛집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는 건 아니다. 다만, 누군가는 분명 단골집 삼고 싶을 만한 곳, 개성 있는 공간 연출과 운영방식을 지닌 곳이라는 점에서는 엄지손을 척 들어주고 싶다. 그리고 비록 인스턴트식품과 전자레인지를 이용하지만 열심히 조리하는 정성 역시 ‘맛’의 감각에 일조한다는 걸 깨닫게 해준 곳이기도 하다.


공예가 주인장의 작업실 겸 술집
전자레인지로 만든 마요네즈 짜장면
몽환적인 인테리어만큼 독특한 맛


요즘 작업을 통 못해서 자신을 ‘공예가’라고 소개하기에 겸연쩍다는 주인장의 모습이 다시 생각난다. ‘물결’이 그녀가 좋아하는 일을 맘껏 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 전시장이자 마켓이자 소통의 장 그리고 주인장에겐 작업실로, 사람들에겐 아지트로. 우리 같은 취객들에겐 시원한 맥주 한 잔에 케첩 팍팍 찍은 소시지 건배의 기쁨을 나눠주는 곳으로 오래 사랑받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글 김민지.
푸드 스타일리스트. 스타일링 공방‘꾸밈’을 운영하며 메뉴 개발 및 촬영, 제품 스타일링, 소품 디자인 제작 등을 하고 있다. 영화 ‘부당거래’ ‘암살’ ‘아가씨’ 등과 LG디오스 등 다수의 CF에서 공간연출 및 테이블세팅, 푸드 스타일링을 맡았다.


물결
·주소: 을지로 130-1 401호
·전화번호: 070-4142-7202
·영업시간: 공식적으로는 오후 5시~오후 11시. 변경 시에는 인스타그램(@_mulgyeol 작업실+펍)으로 공지
·주차: 불가능
·메뉴: 소시지 1만2000원, 나초 7000원, 라면·짜파게티5000원, 팝콘 4500원, 마른안주 1만원
·드링크: 병맥주 5000~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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