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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로 읽는 북한...'최고영도자 김정은 동지', 영어론 뭘까?

중앙일보

입력

바쁜 세상이다. 이왕이면 북한 뉴스를 읽으며 영어공부도 하면 어떨까 싶었다. 코리아중앙데일리(뉴욕타임스와 파트너인 회사다)에서 만8년 근무한 뒤 중앙일보에서 9년째 근무하고 있는 터라 더 그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통일부를 출입하는 터라 매일 읽어야 하는 북한의 관영 매체들 - 조선중앙통신ㆍ노동신문(노동당 기관지) 등 - 중, 조선중앙통신은 친절히도 영문 서비스까지 제공하고 있다. 이건 영업 비밀이지만, 기자는 때로 ‘조선어’ 기사를 읽다가 이해가 안 되면 영문 기사를 읽는다. 그게 더 간결하기 때문이다. 짧기도 하고.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 [중앙포토]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 [중앙포토]

조선중앙통신 영문판 [조선중앙통신 캡처]

조선중앙통신 영문판 [조선중앙통신 캡처]

조선중앙통신은 조선어뿐 아니라 영어ㆍ중국어ㆍ일본어ㆍ러시아어 등 다국어로 서비스를 한다. 자신들이 ‘최고 존엄’이라고 부르는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활동을 글로벌하게 만방에 알리기 위함이다. 그러나 북한도 같은 한민족이다. 영어로 번역을 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린다. 핵실험 발표와 같이 짧고 긴박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영어 기사는 대략 1일 정도의 시차를 두고 업데이트 된다. 김정은 위원장이 새로 리모델링한 조선혁명박물관을 방문했다는 기사는 지난 28일 업데이트가 됐다. 3754자에 달하는 장문의 기사였다. 영문기사는 29일 올라왔다. 더 짧았다. 2969자였다.
아래는 해당 기사 화면을 캡처한 것이다. 링크를 요구하는 분들도 있겠으나, 대한민국 영토에선 비법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고서는 접속할 수 없음을 미리 공지드린다.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 영문판 집중 해부

북한 김정은 위원장의 조선혁명박물관 방문을 보도한 조선중앙통신 영문기사. [조선중앙통신 캡처]

북한 김정은 위원장의 조선혁명박물관 방문을 보도한 조선중앙통신 영문기사. [조선중앙통신 캡처]

북한 김정은 위원장의 조선혁명박물관 방문을 보도한 조선중앙통신 조선어판 기사. [조선중앙통신 캡처]

북한 김정은 위원장의 조선혁명박물관 방문을 보도한 조선중앙통신 조선어판 기사. [조선중앙통신 캡처]

맨 위를 보면 역시 김정은에 대한 칭호가 나온다. Supreme Leader of DPR Korea다. 북한의 공식 명칭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어 명칭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를 줄여서 DPR Korea라고 적었다. 여기에다 김정은에 대해선 최고 지도자라는 의미로 ’supreme leader‘라는 표현을 썼다. 그런데 이상한 게 있었다. 본문에서 김정은을 그냥 Kim Jong Un이라고 표기한 것이다. 모르는 사람들은 영어에는 존댓말이 없다고 하지만 그건 그야말로 모르는 소리다. 영어에도 존칭과 존대어법이 엄연히 존재한다. 예를 들어, 존칭을 쓸 경우 쓰는 타이틀로는 남성의 경우 His Excellency가 있다. 고색창연한 옛날 말 같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현재 외교 문서에도 자주 등장한다. 이런 말을 붙이지 않을 경우 근본도 모르는 분이 되실 수 있다. 주한 일본대사에게 영문으로 편지를 쓴다고 치자. 시작은 “Dear Your Excellency Ambassador Nagamine”가 되어야 한다. 이런 걸 무료 콘텐트로 제공하다니 독자 여러분들은 오늘 대박 나신 거다.
다시 김정은으로 돌아가자. 북한은 왜 영문 기사에 그냥 Kim Jong Un이라고만 썼을까. 물론 김정은 이름에만 볼드표기를 해서 충성을 드러낸 방식은 조선어 기사와도 같다. 그러나 하다못해 Mr. Kim 이라는 호칭도 쓰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추론이 가능하다. 첫번째는 몰라서. 두번째는 일부러.
첫번째 가정을 보자. His Excellency Kim Jong Un이라는 표현을 몰랐을 수가 있다. 모르는 건 죄가 물론 아니다. 기사 첫 문장을 보면 김정은의 다양한 호칭을 열거하고 있다. 다음과 같다. “Kim Jong Un, chairman of the Workers‘ Party of Korea (WPK), chairman of the DPRK State Affairs Commission and supreme commander of the Korean People’s Army, gave field guidance to the remodeled Korean Revolution Museum.” 이 문장을 구성하는 220자 중 63자를 제외한 157자가 모두 김정은의 호칭과 관련된 것이다. 징하다. 『Elements of Journalism』을 쓴 미국 언론학자 빌 코바치 박사가 봤다면 “이건 기사 문장의 기본 요소도 못 갖췄다”며 빵점을 줬을 거다. 그러나 북한 기자들을 탓할 수는 없다. 이렇게 쓰지 않으면 노동당 선전선동부가 승인을 해줄리 없다.
두번째 가정은 조금 비논리적일 수 있다. 북한이 영문기사를 내보내면서는 국제적 기준에 맞추어 김정은에 대한 호칭을 일부러 쓰지 않았을 수 있다는 추론이다. 민주사회이며 만민이 평등한 사회임을 일부러 선전하기 위해 존칭을 쓰지 않았다는 것인데 사실 조금 납득이 어렵다.

영어 문장은 어떨까. 북한 전문 뉴스 사이트인 NK News를 창립한 채드 오캐럴은 지난 2015년 기자와 만나 “북한의 영어 수준은 꽤 높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기자도 그에 동의한다. 이 문장을 보자.
“Saying that it is an unshakable will of our party to usher in the golden age of education in the revolutionary traditions, he stressed that to intensify the education in the revolutionary traditions at present is a crucial matter decisive of the victory of the revolution.” 그러니까 김정은이 그 박물관에 가서 여러가지 칭찬을 했다는 건데, 주목할만한 표현은 ‘usher in’이다. 네이버 사전을 찾아보자.
“usher something in: (격식) ~이 시작[도입]되게 하다. 예문: The change of management ushered in fresh ideas and policies(경영 변화로 신선한 아이디어들과 정책들이 도입되게 되었다).”
격식을 갖춘 문구라는 의미다. 그렇게 어려운 단어가 아니면서도 고급스러운 표현이다. 이를 북한이 아무렇지도 않게 쓰윽 집어넣은 것이다. 전반적으로도 이 기사만 놓고 볼 때 영문 기사의 레벨은 단어만 놓고 보면 고교생이면 거의 아는 단어다. 그럼에도 격식을 갖춘 문구를 동원할 줄 아는 게 북한식 영어인 것이다. 『평양의 영어선생님』을 쓴 작가 수키 김은 북한에서 실제로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친 경험을 토대로 이렇게 말했었다. ”(해리 포터) 영화를 틀어줬더니, (아이들이) 완전한 몰입 상태가 됐다. 여느 아이들과 같은 모습. 그럴 땐 이곳이 평양인 걸 잊기도 했다.“ 남이나 북이나, 영어를 열심히 공부한다는 점에서 우린 역시 한민족인가보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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