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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인에게 품었던 연정, 하숙시절 비밀들이 술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미당 서정주(1915∼2000) 시인.

미당 서정주(1915∼2000) 시인.

산문까지 잘 쓰는 시인 드물다는 속설은 미당 서정주(1915∼2000) 시인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그의 산문은 몇 문장만 읽어봐도 슬그머니 재미있는 글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뜻밖의 풍속과 일화, 상식의 허를 찌르면서도 보편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메시지, 능란한 글솜씨 등이 복합 작용한 결과다.

미당 서정주 전집 8-11권. 

미당 서정주 전집 8-11권.

그런 미당 산문을 한데 모은 책이 나왔다. 20권짜리 '미당 서정주 전집'(은행나무)의 산문 편이다. 8권에서 11권까지 네 권 안에 미당이 60년 넘는 문필 인생 동안 남긴 숱한 산문을 대부분 모았다. '떠돌이의 글'이라는 제목을 붙인 8권에는 193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신문·잡지 발표 글, 9권 '안 잊히는 사람들'은 제목대로 사람에 얽힌 추억, 10권 '풍류의 시간'은 신라 풍류, 불교, 한국의 미 등에 대한 사색, 11권 '나의 시'는 '화사' '동천' 등 주요 작품들에 대한 자신의 해설을 담았다.
계통과 분류를 앞세운 편집산문이지 전체를 관통하는 내러티브는 없기 때문에 중구난방 읽어도 된다. 읽다 보면 영롱한 시편들을 생산한 시인의 민얼굴, 구수한 성정이 보인다.
시인은 산문정신에 투철하다. 거짓이나 가감 없이 겪은 대로 털어놓는 필법 말이다. 서울의 중앙고등보통학교(현 중앙중고교) 시절 광주학생운동에 동조했다가 고초를 겪은 일을 기록한 '광주학생사건과 나'의 끝부분에서 하숙을 함께한 선배라는 녀석이 남색을 하자고 보채 난처했다는 사연을 소개한다. 8권에 나와 있다.
미당의 작품 중에서도 명시로 꼽히는 '동천'은 실은 마흔 넘어 한 여인에게 품게 된 연정을 승화한 작품이다. 11권 '동천 이야기'에서 고백했다.
인물평도 재미있는데, 9권 '문사 이어령'에서 "끈적끈적 달라붙어 귀찮게 하지 않고, 괜찮게 선선히 스스로 불어오고 불어가는 바람 같아서 남에게 폐단이 되는 일이 없는 그런 기분 좋은 신선함-그의 그런 점을 나는 좋아한다"고 밝힌 후 "내 생각 속의 그는 여전히 한 '서울대학교 학생'인데, 어느 사이 환갑이라니 그래도 설 쇠는 데는 꽤나 많이 쏘다닌 모양이다"라고 썼다. 1993년에 쓴 글이다.
1∼5권에 미당의 시를 모두 모아 출발한 전집은 이번 산문집 출간으로 반환점을 돌았다. 평론가 이남호씨가 좌장인 전집간행위원회는 늦어도 7월까지는 나머지 아홉 권을 출간해 전집을 완료할 계획이다. 시론, 소설·희곡 등이 나온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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