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 80년 서울의 봄|이후락씨 ″JP가 책임질게 더 많다"포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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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80년 봄 정치흐름의 특징은 정부와 정당간의 어긋남이고 정당내부의 분쟁이다. 3월 들어 정부는 개헌방향에서 정당들과 대립했다.
공화당은 정풍운동이라는 태풍권에 들어갔고, 신민당도 폭력사태에 휩쓸리고 있었다. 이 모든 사태가 때를 같이해 밀어 닥쳤다. 어느 충돌이 먼저였던지는 뚜렷지 않다. 모든것이 같은 시기 한꺼번에 닥친 80년 봄의 이 삼중주는 수수께끼다. 어쨌든 이 삼중주는 봄이 끝나는 신호가 되었다.
정부와 정당간의 대립은 이틀사이 연속적인 정부발언으로 표면화됐다. 제1파는 신현확총리의 발언이다. 신총리는 3월12일 발표된 일본 산케이신문회견, 그리고 외교공관장회의에서 『정부는 앞으로 민주화를 추진할 것이지만 유신체제를 전면부정하는 급속한 민주화는 사회혼란을 가져오므로 단계적으로 신축성있게 대처해 나가겠다. 정치문제만 너무 논의하다보면 안보나 경제에 대한 주의가 산만해지고 이에대한 대처노력이 모자랄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다음날인 13일엔 정부가 국회쪽 반대를 무릅쓰고 끝내 헌법개정심의위원회를 발족했다. 이 위원회는 내각제 또는 절충형 헌법을 주장하는 유진오 권중돈씨등을 특별고문으로 한 각계 68명으로 구성했으며 정부 개헌안을 별도로 만든다고 했다. 최규하대통령은 14일 정부개헌위의 첫 회의에 나와 이완정부제를 정부의 개헌방향으로 제시했다. 최대통령은 그 이유로 『우리 국민이 경험했던 대통령 중심제는 대통령의 유고나 궐위 때 국가의 계속성에 영향을 미치는 등 국가적 위기를 초래할 수 있고, 특히 대통령선거 때 후보자간의 극단적인 대결과 경쟁을 필연적으로 수반케되어 사회혼란을 야기시키고 권력을 남용할 우려가 있다』 는 점을 들었다.

<봄을 깨뜨린 삼중주>
정부의 움직임에 대해 당시로선 여당이라고 해야할 공화당도 조심스럽지만 우려를 표시했다. 김종필공화당총재는 신총리의 발언에 대해 『시국관이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새시대를 맞이하는 방향에서 조금씩 다른 점이 있더라도 조화시켜 나가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최대통령의 이완정부제구상에 대해서는 『절충형은 복잡해서 명백해야하는 현대조직원칙으로 볼 때 거리가 있다고 생각하며 이완정부제는 반대한다』고 말했다.
야당은 훨씬 강하게 반응했다. 신민당은 15일 소속의원·당간부등 8백여명이 마포당사에 모여 민주화촉진 궐기대회를 가졌다. 대회는 정부의 일련의 움직임은 대통령간접선거의 유지·국회의원 중선거구제 채택으로 유신권력의 권역연장을 기도하려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유신의 몽상속에서 역사와 국민에 역행하는 정치음모는 분쇄할 것이라는 등의 6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신민당은 곧바로 국회소집을 요구했다. 국회소집원칙은 김종필·김영삼 두 총재회담에서 이미 합의되어 있었다. 황낙주 신민당총무는 김용호 공화당총무를 만나 총재회담에서 합의한 국회소집 원칙에 따라 국회를 공동소집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국회는 열리지 않았다. 김공화당총무는 『공화당은 국회를 여는데 동의할 수 없다. 이것은 자의반 타의반이다』고 말했다. 황신민당총무는 타의반이 무엇인지를 그때 따져보지 않았지만 공화당이 국회를 열수 없는 상황에 빠져 들어갔다고 했다. 이것은 공화당의 시한폭탄이던 정풍운동이 폭발했기 때문이다.
79년12월에 공화당 소장파의원들에 의해 문제제기만 되었다가 잠자고 있던 정풍바람이 폭발한 것은 이후락씨의 귀국 발언이 불씨다. 불교신도회 회장이라는 직책도 갖고 있던 이의원은 l2월10일 방콕에서 열리는 세계불교대회에 참석한다는 명목으로 12월 초순에 태국으로 떠났다.
그는 예정대로 귀국하지않고 미국에 머물렀다. 그러다가 이듬해 3월14일 로스앤젤레스발·KAL 편으로 95일만에 귀국했다. 그의 출국과 귀국엔 얽힌 얘기가 있다.
그는 공화당내 정풍파가 말하는 부정축재 정치인으로 손꼽혔다. 그랬기 때문에 그의 출국을 허가한 것이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과오로 지적되었다. 정승화씨는 그때를 이렇게 말했다.
『이후락의원은 태국에서 열리는 국제불교대회에 참석하려고 여권신청을 했는데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에서 여권발급을 보류시켰어요. 위장출국인 것 같다는 얘기였습니다. 이씨가 나한테 편지를 보냈는데 이번 출국은 전부터 예정되어 있었던것이라면서 선처를 요청했어요. 제가 노재현국방장관과 상의를 했지요. 장관은 이의원같은 사람에 대해 출국을 규제할 방침이 정부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출국을 허가했습니다. 그가 출국한 뒤 귀국이 늦어진 것은 12·12사태로 내가 제거된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왜 정계엄사령관의 실각이 그의 귀국을 유보시켰을까. 그에 대해 정승화씨는 직접적인 설명은 안했다. 그러나 이런 말은 했다.

<이씨 출국조치는 과오>
『계엄사령부 합수본부에서 부정축재자 수사를 건의한 일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내가 국민의 영웅이 된다고 부추기는 사람도 있었어요. 국방장관과 그 문제를 의논했는데 계엄사령부가 할일이 아니라는 내의견과 일치했어요. 지금 그런 수사를 할 단계도 아니고 도리어 군이 정치에 간여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권력에 대한 욕심을 갖지 않고는 그런 수사를 못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부정축재자 명단을 만들어 주는건 무방하다고 승인을 했읍니다.』 그러니까 이후락씨는 어떤 바람을 예상하고 피난했었고 귀국한 것은 그 바람을 극복하는, 아니 어쨌든 결말을 자청했다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귀국 후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제서야 귀국한 것은 정치적 이유가 아니다. 내가 출국한 뒤에 나온 정치적 얘기 (정풍운동을 말함)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모르지만…내 나름으로는 연락하고 양해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개의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여기서 말이 끝났다면 또 몰랐다. 그런데 그는 『정치자금을 만지다보니…』 라면서 그 유명한 「떡고물」론을 펴고 『박대통령이 없는 마당에 정풍같은 당내문제에 신경 쓸일이 아니다…. 이러면 공화당은 위기에 처할것』 이라고 한 것이다.
공화당 정풍파 의원들이 들고 일어났다.
공화당 정풍파는 최초의 17명에서 박찬종 오유방 정동성 이태섭 김수 박용기 홍성우 윤국노 변정일 등 9명으로 줄었으나 요구는 훨씬 강경했다. 그들은 ①국민의 지탄을 받고 있다고 생각되는 당내인사의 당직사퇴 ②김○○·이후락의원의 탈당 ③민주적 당헌을 마련키 위한 전당대회 소집을 요구했다. 정풍파의 박용기·김수 두 대표는 김종필총재를 면담한 자리에서 그들이 지목하는 당직사퇴 대상을 일단은 10명으로 손꼽았다고 했다. 그러나 뭐라해도 그들의 과녁은 탈당 대상으로 손꼽은 두사람, 특히 이후락의원이었다. 이들은 이후락의원이 14일 귀국해 정풍운동을 비판하면서 떡고물론까지 들먹이게되자 정풍의 필요성이 시급하다고 판단해 18일엔 서울근교에서 낮과 밤 두차례, 그리고 19일 상오 세 번째 모임에서 건의문을 다듬었다고 했다.
김종필총재는 측근 모두를 물리치고 정풍파의 두 대표와 만났다. 발표는 김총재가 정풍파의 뜻은 이해하지만 시기와 방법에 문제가 있다고 했다는 것. 그러나 이해한다는 발표와는 달리 두 대표를 나무라는 김총재의 격양된 고함이 밖에까지 들렸다.
그때 공화당의 정풍운동은 당을 난파선으로 만들만큼 소란하게 했다.
당간부들은 『우리도 신민당처럼 돼가느냐』고 했다. 그들은 정풍대상자의 이름을 공개한것을 인민재판이라면서 부마사대 때 초강경책을 펴던 소장파들이 이제와서 무슨 저의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정풍파내부도 목소리가 갈렸다. 박찬종의원은 『이후락 의원등의 이름을 말한 것은 당직개편 때 둘이 아무 당직도 받지 못한 사실에서 모두가 인식을 같이했다는 증거를 보았다.
그렇지만 두분에 대한 지적은 김총재에게만 말하기로 한 것이지 공개하는 것은 당초의 의도가 아니었다』고 했다. 김수의원은 이름까지는 말하지 않으려 했으나 자숙해야할 인물이 국민감정을 자극하는 발언을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탈당대상이 두 의원에 한정된데 대해 비판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도 김수의원은 『처음엔 P의원도 포함된 세명이었으나 P의원은 자숙의 도를 참작한 것』이라고 했다. 이것 역시 설명과는 다른 얘기가 있었다. P의원은 자숙의 도라기 보다 그때의 주도세력에 영향력이 있기 때문이라는 개운찮은 뒷 얘기였다. 외부의 공작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는 경계의 소리가 파다했다. 처음 정풍운동에 나섰다가 빠져버린 의원들에 대해 정풍파에선 당간부의 회유공작이라고 했지만 빠진 당사자들은 적풍운동의 순수성이 변색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명단공개는 인민재판>
당간부들은 정풍파에 대한 제재를 요구했다. 김종필총재는 조건반사적인 반응은 보이지 않겠다며 조용히 수습하려 하는듯 했다.
그러나 이번엔 정풍운동그룹이 아닌 다른곳에서 김종필총재에게 화살이 날아왔다. 제1파는 무소속으로 있다 이후락의원등과 함께 79년 여름 입당한 대전출신 임호의원의 성명이다. 임의원은 김종필총재를 비난하는 공개성명을 내고 정계에서 물러나라고 요구했다.
신민당의 5·30대회 후 신민당에 입당하려다 공화당의 설득에 의해 마음을 바꾸어 입당한 그는 특별히 김총재에게 화살을 들이댈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도무지 그 배경을 해석할 수 없었다.
제2파는 이후락의원의 반격. 그도 역시 그를 당에서 나가라고 요구하는 정풍파가 아니라 김종필총재에게 포문을 열었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오늘 당의 문제는 김종필총재가 불법으로 총재가 된 이후 흐려놓은 결과다. 만약 내가 정풍대상이 된다면 김종필씨나 나나 과거 경력으로 볼 때 나는 탈당해야 하고 그 사람은 총재로 남겠다는 것은 말이 안되며 오히려 그 사람이 더 책임질게 많다고 본다. 김종필씨는 박대통령이 고인이 된 뒤 마치 박대통령이 잘못한 것을 자기가 책임을 덮어쓴다는 식으로 태도를 취함으로써 고인이 잘못된 양 은연중 풍겼다. 내가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대통령보궐선거 때 김종필씨가 나설때가 아니라는 점을 말한데 대해 좋지않게 생각한 것 같다.
물론 그 이전도 그랬으나 김종필씨는 그때부터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어떻게 하든 나를 멀리하고 몰아내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당에서 물러날 사람으로 기준잡아진 것도 김종필씨가 부여한 셈이다.』 그는 그의 부정축재혐의에 대해서도 반론을 폈다. 『…나는 말없이 내 고향 울산에 육영회를 만들어 7∼8개의 중·고교를 설립, 이미 재산의 환원사업을 해왔다. 요즘 어떤 사람은 축재한 것은 사회에 환원했다고 하는데 우스운 얘기다. 과거 내가 정치자금에 관여했다 해서 돈이 많은 줄 아나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솔직이 말해 딴사람보다는 잘 살았으나 거의 10년 노는 동안 나도 좀 썼고 이제는 별로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박대통령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탈당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의 이 회견은 이날 하오 2시30분쯤 공화당 대변인 실에 전화를 걸어. 3시30분에 기자실에 나가겠다고 자청해 이루어졌다.
당사로 나온 그는 다른 어느 방에도 들르지 않은채 기자실로 곧장 나와 17분간 준비된 얘기를 특유의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곧장 나가려다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지자 다시 앉았다. 김총재가 제명하면 뭔가 폭로하겠다는거냐, 김총재노선에 반기를 들고 싸우겠다는 것이냐는 등의 질문이 따로 폭로할 것은 없다. 제명 얘기는 나중에 하자고 했다.
그의 회견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이태섭 총재비서실장은 일어서는 그에게 『총재께서 잠깐 만나자고 하신다』고 했으나 아무 말 없이 당사를 떠나버렸다.
이의원의 도전의 배경은 수수께끼였다.

<반당행위자 규탄대회>
이후락씨는 항상 앞뒤를 재어가며 살아왔다. 그런 그가 자신의 안전과 정치적 장래에 대한 설계 없이 감정 폭발을 했다고 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김총재를 공격함에 있어 박대통령의 유업을 계승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것은 범여당권의 단합을 추구하고 있는 김총재에게 가장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얘기다.
어쨌든 그는 김총재와 갈라섰다. 당시로선 원내 제1당의 총재며 의외의 변화가 없는 한 앞으로 선거에서 여당권의 유일한 대통령후보인 김총재다. 그런 김총재에게 도전한다는 것은 그 도전으로 인해 자신의 파멸이 오지 않는다는 최소한의 보장이 있다는 얘기였다. 그러니까 김총재가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할 가망은 없다거나, 아니면 김종필씨에겐 정권도전의 기회가 없으리라는 그 나름의 정세판단이 있지 않느냐고들 했다. 그가 미국에 머물면서 P의원과 접촉했고 P의원으로부터 어떤 언질을 받고 귀국했으리라는 얘기도 그런 추측을 낳게 했다.
공화당은 폭풍권에 들어갔다. 당은 세군데서 회의를 열었다. 김종필총재는 백남억·정일권·이효상등 고문들을 불러 회의를 했다.
다른 한쪽에선 당무회의를 했고 사무국은 사무국대로 별도 회의를 했다. 3시간 이상 회의를 하고 총재실을 나오는 고문들은 모두 노코멘트였다. 정고문은 여러가지 의견은 나왔지만 결정된것은 없다고 했고, 백남억 고문은 이효상 고문에게 물어보라 했고 이고문은 나 자신도 아무 결정을 못했다고 했다.
김총재도 오늘은 아무얘기도 않겠다고 했다. 이의원이 너무 자신있게 나오는 것 같다는 기자들의 지적에 지난 18년간 이런일은 연속됐다, 이의원은 자신때문이 아니라 사람이라는게 흥분하면 자제력을 잃는 수도 있으니 냉정해지기 바란다고 했다.
그러나 이미 강경한 당의 방침은 정해져 있었다. 이것은 3월25일상오9시 중앙당 강당에서 청년분과위원회주최로 반당분자 이후락·임호규탄대회를 연다는 당의 고지가 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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