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만지작대는 환율조작국 카드, 협상용에 무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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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우리금융경영연구소 리포트

미국 재무부는 매년 4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교역대상국들의 환율정책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한다. 4월이 다가오면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후보 시절부터 공언한 중국을 비롯한 주요 교역 대상국의 환율조작국 지정 여부에 외환시장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통화가치 저평가 여부 판단 어려워 #한국·대만 대미 무역흑자 많지 않아 #미 싱크탱크 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 #“미, 상계관세 부과가 더욱 효과적”

미국의 교역촉진법(2015년)에 따르면 환율조작국으로 지정될 수 있는 요건은 첫째 국내총생산(GDP) 대비 경상수지 흑자 비율 3%, 둘째 대미 무역수지 흑자 200억 달러 이상, 셋째 연간 GDP 대비 2% 이상의 달러 매수 외환시장 개입 등이다. 현재 미국의 주요 교역대상국 중에서 이러한 요건에 해당하는 국가는 없다. 그러나 미 재무부는 지정 요건의 세부사항을 재량으로 변경할 수 있으며, 또한 지정요건이 명시되어 있지 않은 종합무역법(1988)을 활용하여 환율조작국 지정을 시도할 수도 있다.

후보 시절의 ‘파격적인’ 공약을 실제로 이행하는 모습을 수차례 보여준 트럼프 대통령이 환율조작국 문제에 있어서 어떤 입장을 취할지 예단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문제는 특정 교역대상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한다고 해서 해당국의 통화가치가 달러 대비 상승할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에 있다.

1992년 변동환율제 하에서 환율조작국으로 지정되었던 대만의 사례를 보면, 지정 직후 달러 대비 통화가치가 일시적으로 상승하기도 했으나 조만간 하락세로 돌아서는 등 환율조작국 지정의 실효성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특히 현재 중국에서는 위안화 절하 기대를 배경으로 자본유출이 지속하고 있어 중국이 환율조작국으로 지정되더라도 달러 대비 위안화 가치가 상승할 것이라고 전망하기 어렵다. 해외 주요 투자은행들은 현재 6.9위안 수준인 위안-달러 환율이 올해 안으로 7위안을 상회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미국은 주요 교역대상국들이 통화가치를 인위적으로 낮게 유지하면서 수출에서 불공정한 혜택을 보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통화가치 저평가 여부를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렵다. 미국의 싱크탱크로 알려져 있는 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PIIE)는 일본, 한국, 스위스, 대만 등의 통화가치가 각각 균형환율 대비 4%, 7%, 7%, 25% 저평가되어 있다고 보고 있으나, 국제통화기금(IMF)은 일본과 한국은 각각 11%, 8% 저평가된 반면 스위스는 오히려 15% 고평가된 것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트럼프 정부의 교역대상국 환율조작에 대한 비판이 타당한 것인지에 대한 논란도 지속하고 있다. 환율조작과 관련하여 가장 큰 비난을 받는 중국은 수출 증대를 위해 위안화 가치를 절하하기 위한 달러 매수개입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유출에 대응하여 위안화 가치의 하락을 억제하기 위한 달러 매도 개입을 하고 있다. 트럼프 정부는 독일에 대해서도 환율을 문제삼고 있는데, 독일의 경우 유럽중앙은행의 완화적인 통화정책이 통화가치 하락의 배경이 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는 독일의 수출경쟁력 증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유로존 전체의 경제여건을 고려한 결과이며, 유럽중앙은행이 외환시장에 개입한 사례도 없다.

또한 환율조작국 지정에 따른 미국의 최종적인 경제적 손익도 불분명하며, 해당국과의 정치외교적 갈등도 부담이 될 수 있다. 특히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할 경우 미국은 중국의 보복조치로 인해 대중 수출 의존도가 높은 산업(농산물 20%, 항공기산업 13% 등)의 타격이 불가피하며, 미·중 양자 투자협정(BIT)의 체결 지연에 따른 미국 기업의 중국 진출 차질 등도 예상되는 부작용이다. 게다가 환율조작국 지정이라는 경제적 이벤트가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 북한 문제, 남중국해 영토분쟁 등의 지정학적 갈등을 악화시킬 가능성도 있다.

물론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이 환율조작의 챔피언”이라고 발언하는 등 강경한 태도를 표명하고 있지만, 정부의 고위 관료들이나 미국 내 여론이 일치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스티븐 므누신 재무장관은 “(환율조작 여부를) 기존의 절차대로 분석할 것”이라며 그대로 적용할 경우 해당국가가 없는 기존의 환율조작국 판정 기준을 유지할 가능성을 시사한 바 있다.

미국의 싱크탱크들도 최대 대미 무역흑자국인 중국의 환율조작국 지정 필요성에 대해 회의적이다. 미국 기업연구소(AEI), 브루킹스연구소뿐만 아니라 과거 수년간 중국의 환율조작을 강하게 비판해 온 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 등도 중국의 환율조작국 지정에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환율조작국 지정보다는 상계관세 부과가 더욱 효과적이라거나(PIIE), 중국의 지적재산권 침해 및 중국 국영기업의 불공정 경쟁 등이 더욱 중요한 문제라는 입장(AEI)이다.

이처럼 환율조작국 지정의 실효성에 대한 논란, 미국 내 여론의 불일치 등을 감안할 때, 트럼프 정부는 실제로 환율조작국 지정을 강행하기보다는 하나의 카드로 활용하면서 교역대상국과의 여러 분야에 걸친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려 할 가능성이 높다. 예컨대 지난 2월 미·일 정상회담 직후 일본공공연기금(GPIF)은 미국의 민·관 합동 인프라 투자 프로젝트에 참여를 결정했는데, 이는 정상회담에서 환율 문제를 논의하지 않은 데 대한 대가일 가능성도 거론된다.

그러나 실효성이 의심스러운 무리한 정책이 실제로 시행되는 경우도 많다는 점, 게다가 트럼프 대통령의 파격적인 정책 행보 등을 감안할 때,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가 막대한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주요 지지층의 기대를 의식하여 당초 공약대로 환율조작국 지정을 강행할 가능성도 있다. 이 경우 미국 무역적자의 47%를 점하고 있는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을 비롯한 스위스, 대만 등도 대상이 될 수 있다. 스위스, 대만, 한국은 경상수지 흑자 규모가 각각 GDP 대비 10.0%, 14.8%, 7.9% 등으로 매우 크며, 스위스와 대만은 정책당국이 외환시장에서 달러 매수 개입을 지속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국의 경우 최근 1년간 오히려 달러 매도 개입을 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PIIE와 IMF는 대만과 한국의 통화가치가 크게 저평가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스위스와 대만, 한국에 대한 미국의 무역적자 규모를 모두 합하더라도 전체 적자의 8%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환율조작국 지정의 실익이 거의 없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미국 AEI 등은 글로벌 분업체제를 고려할 때 대미 무역흑자 그 자체보다는 전체 무역수지 흑자 규모가 더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예컨대 중국으로의 부품 수출, 중국에서의 조립 및 가공을 통한 대미 수출이라는 방식을 통해, 간접적으로 대미 흑자를 누리고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해당국의 전체 무역수지 흑자 규모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준에 따르면 경상수지 흑자가 7.9%를 기록한 우리나라도 환율조작국 지정 가능성에서 자유롭지 않다.

송경희우리금융경영연구소수석연구원

송경희우리금융경영연구소수석연구원

과거에도 미 재무부의 환율보고서 발표를 앞둔 시점에서 환율조작국 지정 가능성이 있는 나라의 통화는 강세를 취하는 경향이 있어 왔다. 이러한 요인은 달러화 대비 원화 가치 상승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으나, 이것만으로 원-달러 환율의 향방을 예상하기는 어렵다. 미 연방준비제도(Fed)의 금리인상 속도와 폭 등도 중요한 요인이다.

송경희 우리금융경영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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