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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을 든 여경 “팝아트 초상화로 행복 지켜드릴게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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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팝아트 초상화 그리기가 취미인 최윤정 경장은 지금까지 100명이 넘는 시민·경찰·유명인들에게 초상화를 그려줬다. 최 경장이 2일 자신이 그린 딸 윤서연양의 초상화를 들어 보이고 있다. [연천=오종택 기자]

팝아트 초상화 그리기가 취미인 최윤정 경장은 지금까지 100명이 넘는 시민·경찰·유명인들에게 초상화를 그려줬다. 최 경장이 2일 자신이 그린 딸 윤서연양의 초상화를 들어 보이고 있다. [연천=오종택 기자]

캄캄한 밤, 한 경찰이 ‘붓’을 집어든다. 사진 속 얼굴을 예리하게 훑더니 붓에 아크릴 물감을 묻혀 캔버스 위에 그려낸다. 범인의 몽타주가 아니다. 미소를 머금은 행복한 얼굴이다. 경기도 연천경찰서 경무계에서 근무하는 최윤정(34) 경장은 자신의 취미인 ‘팝아트 초상화’로 재능기부를 펼치고 있다.

최윤정 연천서 경장의 재능기부 #아이 초상화 그리기 무료 강좌 열어 #자녀 얼굴 그리며 부모 반성 기회로 #페이스북엔 “그려 달라” 신청 밀물

그는 경찰 동료 60여 명과 시민 60여 명, 송해·김구라·장윤정·박현빈·이수근 등 유명인들에게 초상화를 그려 선물했다. 또 아동학대 예방을 위해 시민·경찰들을 대상으로 ‘우리 아이 초상화 그리기’ 무료 강좌를 열고 있다. 시민들의 초상화는 자신의 페이스북(www.facebook.com/miffywiz)을 통해 신청을 받는데, 그의 페이스북 친구는 5000여 명에 달한다.

최윤정 경장이 2일 경기도 연천경찰서에서 자신이 그린 팝아트 초상화를 선보이며 인터뷰 하고 있다. [사진 오종택 기자]

최윤정 경장이 2일 경기도 연천경찰서에서 자신이 그린 팝아트 초상화를 선보이며 인터뷰 하고 있다. [사진 오종택 기자]

2일 연천경찰서에서 최윤정 경장을 만났다. 그는 “연천경찰서의 동료들에게 초상화를 선물하는 일로 출발했다”면서 “그림 실력이 부족하지만, 초상화를 받은 사람들이 기뻐하는 표정을 볼 때 행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려주게 됐다”고 말했다.

최 경장은 2014년 팝아트 초상화를 독학으로 익혔다. 블로그 등 인터넷 자료를 교본으로 삼았다. 같은 경찰서 윤윤환 경장과 결혼한 그는 당시 임신을 해 육아휴직 중이었다. “친정식구는 고향인 대구에 살고, 동네 주변엔 문화생활을 할 만한 곳이 없었어요. 몸무게가 30kg이나 늘고 우울증도 찾아왔지요. 인터넷 검색을 하다 우연히 알게 된 팝아트 초상화로 생활의 활력을 되찾았어요.”

세 살난 딸을 둔 엄마인 최 경장은 2016년 5월부터 자녀의 초상화를 그리는 강좌를 열고 있다. 아이의 얼굴을 그리면서 사랑을 되새길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최 경장은 “아동학대 가해자의 80%가 친부모”라고 강조했다. 매월 마지막주 수요일마다 연천경찰서 3층 강의실에서 열리는 이 강좌엔 정원 20명을 웃도는 신청자가 몰리곤 한다. 수강생들은 4~5시간 동안 아이의 눈·코·입·속눈썹 하나하나를 정성스레 그린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아이에게 상처를 줬던 일들을 털어놓고 반성도 한다. 최 경장은 “아이의 얼굴을 그리다보면 평소 아이에게 무심코 내뱉는 말이나 행동을 돌아보게 된다”며 “그런 말들이 아이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지 깨닫고 반성하는 계기가 된다”고 말했다. 수강신청은 최 경장의 페이스북을 통해 누구나 할 수 있다.

최윤정 경장이 초상화를 그려선물한 방송인 김구라(왼쪽)와 지난해 퇴직한 김현겸 전 경위.

최윤정 경장이 초상화를 그려선물한 방송인 김구라(왼쪽)와 지난해 퇴직한 김현겸 전 경위.

최 경장의 페이스북에는 하루에도 몇 건씩 ‘초상화를 그려 달라’는 신청이 올라온다. ‘아이의 돌잔치 상에 올리고 싶다’ ‘임신한 아내에게 주고 싶다’는 등의 갖가지 사연들이 있다. “전남 완도에서 아이를 홀로 키우는 한 아버지의 부탁으로 아이의 초상화를 그려 보내드린 적이 있어요. ‘아들이 잘 때도 초상화를 끌어안고 잔다’는 이야기에 뿌듯했어요.”

최 경장은 연천 지역 행사에 유명인들이 출연한다는 정보를 ‘입수’하면 초상화를 그려 직접 찾아간다. 경찰서에서 펼치는 캠페인 동영상에 출연을 부탁하기 위해서다. “정성을 봐서라도 거절 못하세요.”(웃음) 처음엔 동료 경찰들로부터 ‘경찰이 무슨 그림이냐’는 곱지 않은 시선도 받았다. 하지만 최 경장의 초상화는 경직된 경찰서 분위기도 바꿔 놓았다. “초상화를 전해주며 인증샷을 찍으면서 한 번 웃고, 주변 동료들이 ‘그림이 얼굴이랑 똑같네’라고 하면 한 번 더 웃어요.”

여성·청소년계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최 경장은 “팝아트 초상화를 가정과 학교폭력 피해자와 가해자를 상담 치유하는 데도 활용하고 싶다”고 말했다.

연천=임선영 기자 youngcan@joongang.co.kr
사진=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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