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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원만 투자해도 원주민 일자리 만들고 스타트업 키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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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1호 18면

‘착한 소비’ 늘리는 크라우드펀딩

최근 고귀현(30) 크래프트링크 대표는 e메일로 여행 사진을 받았다. 마야의 3대 문명으로 손꼽는 과테말라의 티칼 유적지를 배경으로 일곱 가족이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다. 난생 처음 가족들과 여행지에서 사진을 찍은 과테말라 원주민들이었다. 지난해 고 대표가 네이버 해피빈의 공감펀딩에서 진행한 프로젝트 ‘남미의 매력이 담긴 수공예 팔찌’가 성공하면서 가져온 변화다. 그는 대학생 때 남미로 석 달간 배낭여행을 갔다가 구걸하거나 기념품을 팔기 위해 길거리로 나오는 수많은 아이들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아이들을 학교로 돌려보내기 위해선 부모들에게 일자리가 필요했다. 그가 만난 남미 여성들은 실을 꼬거나 매듭짓는 손재주가 좋았다. 고 대표가 중간 상인이 돼서 이들이 만든 팔찌를 온라인으로 판매하는 펀딩을 진행했다. 지난 3월부터 3개월 동안 1349명이 참여했고 목표액(700만원)보다 5배가 많은 약 3600만원이 모였다. 고 대표는 “모금액으로 17명 원주민 여성에게 임금을 주면서 자녀들도 학교를 다니게 됐다”고 말했다. 특히 모금액 중 600만원은 이들의 평생 소원이었던 여행 자금에 쓰였다.

글로벌 크라우드펀딩액 39조원 #400억 규모 한국은 걸음마 단계 #온라인에서 클릭 한번으로 참여 #종양 환자 살리려 3만 명 기부도 #예술가·기업 돕는 플랫폼도 늘어 #“증권형 펀딩 투자 한도 늘려야”

이처럼 여러 사람이 지갑을 열면서 모은 쌈짓돈이 어려운 이웃을 돕거나 자금난에 허덕이는 스타트업 기업을 살리고 있다. 최근 온라인 상에서 손쉽게 기부나 후원할 수 있는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이 잇달아 생기면서 착한 소비에 투자자의 관심도 커지고 있다. 김영각 KB증권 투자솔루션부 차장은 “크라우드펀딩(Crowd Funding)은 단어 그대로 블특정 다수의 대중으로부터 자금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일정 기간 내 목표 자금을 조달받지 못하면 펀딩에 실패한다”고 말했다. 그는 신생 기업이나 개인은 담보 없이 뛰어난 아이디어만으로 제품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할 수 있고 투자자는 1만원 등 소액으로도 예술가를 후원하거나 기업에 투자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세계적으로 크라우드펀딩 시장은 성장세가 가파르다. 미국 시장조사기관 매솔루션에 따르면 글로벌 크라우드펀딩 규모는 2015년 기준 340억 달러(약 39조원)로 3년 전(27억 달러)보다 10배 이상 증가했다. 이와 달리 국내 시장은 걸음마 수준이다. 한국인터넷진흥원은 현재 국내 크라우드펀딩 규모는 400억원(지난해 2월 기준) 수준인 것으로 분석했다.

펀딩 방식은 기업 프로젝트에 기부하거나 투자한 뒤 물품(신제품)으로 돌려받는 기부·보상형, 개인이 돈을 빌려준 뒤 프로젝트가 끝난 뒤 원리금을 상환받는 대출형, 투자를 목적으로 신생 기업에 투자하는 지분형 3가지로 나뉜다.

어려운 이웃, 예술가 돕는 해피빈·텀블벅

이 중에서도 국내에선 기부·보상형 펀딩이 많다. 사회단체나 개인이 공익 목적으로 온라인 크라우드펀딩 시스템을 적극 도입하고 있어서다. 2015년 국내 처음으로 온라인 기부 플랫폼을 선보인 곳은 해피빈의 공감펀딩이다. 지난해 10월 신경섬유종으로 얼굴 전체가 종양으로 덮인 심현희씨의 ‘평범함이 간절한 33살 그녀’ 사연이 공감펀딩에 소개되면서 화제가 됐다. 그의 수술비 모금에 무려 3만4789명이 참여해 약 5억원을 모았다. 지난해 공감펀딩 최대 규모다. 권혁일 해피빈재단 이사장은 “기부형 크라우드펀딩은 개인이 수많은 후원 리스트를 꼼꼼하게 살펴본 뒤 가장 공감이 가는 사연을 찾아 후원하기 때문에 만족도가 클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이곳엔 공익단체는 기본이고 소셜벤처·사회적기업·협동조합 등 누구든지 참여해 자신의 공익적인 취지를 알린 후 후원금을 모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올 들어서만 1만7000여명이 공감펀딩에 참여해 모금액이 4억4000만원을 넘어섰다.

가난한 예술가를 후원하는 크라우드펀딩 플랫폼 ‘텀블벅’도 유명하다. 텀블벅 사이트에 출판·게임·공연 등 문화·예술계 제작자의 프로젝트를 소개한 뒤 일정기간 후원 목표액을 모으는 방식이다. 텀블벅 관계자는 “최근 획일적인 공산품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취향을 찾는 소비자가 늘면서 이들이 창작자의 프로젝트를 응원하고 후원하는 제2의 창작자로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성공한 펀딩 수만 18만 건으로 1년 전(약 6만 건)보다 2배 이상 늘었다. 이민경(25)씨는 지난해 텀블벅에서 페미니즘을 알리는 저서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을 출판하기 위해 후원금을 모집했다. 놀랍게도 20일 만에 4300만원이 넘는 금액이 쌓였다. 이뿐이 아니다. 이 책은 대형 서점가에서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렸다. 이씨는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며 “이 프로젝트를 계기로 독립출판사 봄알람을 세운 뒤 적극적으로 여성 인권을 알리는 책을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대출형 크라우드펀딩은 국내에서 2007년 개인간(P2P) 중금리 대출로 알려졌다. 대표적인 플랫폼이 에잇퍼센트다. 대출자와 투자자를 직접 연결하는 모바일 대출·투자 중개서비스로 2금융권보다 저렴하고 합리적인 금리를 제공하는 게 특징이다. 지난 2년간 에잇퍼센트의 연평균 수익률은 9.7%이며 누적 대출액은 517억원에 이른다.

스타트업의 자양분 되는 증권형 펀딩

최근 정부에선 지난해 1월 도입한 증권형 크라우드펀딩에 공을 들이고 있다. 사업자가 증권을 발행하고 소액 투자자가 이를 매수하는 증권형이 스타트업의 새로운 자금조달 통로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어서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지난 1년간 116개 기업이 펀딩에 성공했다. 7000여명의 투자자에게 조달받은 금액만 180억원에 달한다. 중개업체는 와디즈 등 기존 5곳에서 14개 기업으로 증가했다.

정보기술(IT) 전문가들은 증권형 크라우드펀딩 시장이 활성화되려면 각종 규제부터 완화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미 중국은 크라우드펀딩을 국가 차원에서 창업 장려 지원책으로 활용하고 있다. 중국의 시장조사업체 아이리서치는 2015년 상반기에만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자금을 조달한 규모가 100억 위안(1조6700억원)으로 1년 전보다 200%이상 늘었다고 밝혔다.

김영규 전자부품연구원 선임연구원은 “국내 증권형은 일반 투자자는 한 기업에 200만원 이상 투자할 수 없고 연간 500만원을 넘기지 못한다”며 “개인 투자자에 대한 투자금액 상한액이 낮아서 규제 완화를 주장하는 업계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영각 차장은 “한국 사회에서 스타트업이 기술이나 제품 개발에 실패하면 재기하는 게 쉽지 않다”며 “정부는 증권형 크라우드펀딩을 통한 원활한 자금 조달뿐 아니라 지속적인 지원이 뒷받침돼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염지현 기자 yj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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