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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리셋 코리아

대기업 지배구조 개선, 주주·시장 역할 강화로 풀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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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나현철
나현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정경유착 고리 확실히 끊자

‘최순실 게이트’의 본류인 K스포츠·미르재단에는 700억원이 넘는 기업 자금이 들어갔다. 삼성 등 국내 53개 대기업이 규모에 비례해 돈을 냈다. 하지만 이들 중 이사회 의결을 거친 건 포스코와 KT 단 두 곳뿐이다. 투명경영위원회(기아차)나 윤리위원회(현대모비스) 등 최소한의 절차를 거친 곳까지 더해도 네다섯 곳에 불과하다. 두 재단은 운영 목적이나 설립 주체가 처음부터 불분명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기업은 ‘대통령 관심사항’이라는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채근을 받고 서둘러 수억~수십억원씩을 입금했다. 어디에 쓸 돈인지, 불법의 소지는 없는지 등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기업 내부의 의사결정구조가 그만큼 부실했다는 얘기다.

리셋 코리아 기업지배구조분과 제안 #규제만으론 지속가능 개혁 어려워 #기관투자가의 주주권 행사 투명화 #‘스튜어드십 코드’ 적극 활용 필요 #공정위 개입 줄여 당사자 해결 유도를

기업들은 “미운 털이 박힐까 봐 두려워서”라고 해명한다. ‘우리도 피해자’라는 논리다. 청와대 수석이 직접 오너 사퇴를 주문하는 등 정권의 압박이 워낙 심했던 데다 전두환 정권 당시 ‘국제그룹 해체’ 악몽이 뇌리에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민은 납득하기 쉽지 않다. 기업은 돈을 버는 곳이다. 많이 벌수록, 적게 쓸수록 좋다. 조금이라도 이상하거나 낭비된다 싶으면 어디에선가 걸러져야 제대로 된 회사다. 실무진이 감당하기 힘들면 이사회의 판단이라도 구해야 한다. 그런데 아니었다. 뭔가 대가를 바라지 않았겠느냐는 의심이 제기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마침 이번 사건에 연루된 기업들은 제각기 현안을 갖고 있었다. 인수합병이나 총수 사면, 경영권 다툼 등이다. “재벌도 공범이다”라는 광장의 의심도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중앙일보·JTBC의 국가 개혁 프로젝트 ‘리셋 코리아’의 기업지배구조 분과는 이런 문제의 뿌리가 불투명한 기업 지배구조에서 비롯된다고 진단했다. 적은 지분을 가진 지배주주가 계열사 간 출자를 통해 경영권을 유지하다 보니 전체 주주의 이익보다 총수 일가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행태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이해상충을 제한할 수 있는 기업 내부와 사회적 시스템은 미비하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총수가 있는 10대 기업집단의 총수 일가 지분은 지난해 평균 2.6%에 불과했다. 반면에 다단계 교차 출자를 통한 계열사 지분율은 54.9%에 달했다. 범위를 45개 기업집단으로 넓혀봐도 총수 일가 지분율은 4.1%로 계열사 지분율 50.6%에 비하면 매우 적다. 영향력과 책임의 이런 불일치는 정경유착으로 이어지기 쉽다. 대주주로선 기업 내부의 문제를 자체적으로 해결하기보다 권력에 기대 손쉽게 해결하려는 유혹을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배구조 분과는 이를 고치려면 정부 규제에만 의존하지 말고 시장이 작동하도록 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기업 문제의 당사자인 대주주와 소액주주·채권자·협력업체·소비자가 공동의 이익을 위해 협업할 수 있게끔 지배구조를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해소하기 위한 과제로 세 가지가 먼저 꼽혔다.

실행과제1. 기관투자가의 적극적 의결권 행사

먼저 기관투자가의 역할 강화를 위한 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의 적극 행사가 필요하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의결권을 포함한 다양한 측면의 주주권 행사 과정을 객관화·투명화하고 그 결과를 공시토록 하는 제도다. 국민연금이나 펀드가 국민과 고객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권리를 행사하는 토대가 된다.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 과정에서 국민연금의 찬성 결정이 수사 대상이 된 건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반대를 권고했는데도 국민연금 내부 논의만으로 찬성 결정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지난해 12월 금융위원회 주도로 제정됐지만 아직 국민연금 등 주요 기관이 수용 여부를 밝히지 않고 있다. 조명현 한국기업지배구조원장은 “지난해 금융위원회가 제정한 스튜어드십 코드를 대표적 기관투자가인 국민연금부터 채택하면 많은 지배구조 문제가 시장에서 해결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행과제2. 다중대표소송 단계적 도입

이는 모회사 주주가 불법행위를 한 자회사 혹은 손자회사 임원들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낼 수 있는 제도다. 현재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지만 소송 남발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재계가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지배구조 분과에선 원고가 피고의 자료를 볼 수 있는 디스커버리 제도가 채택돼 있지 않은 한국의 민사소송 절차를 감안할 때 남소 우려는 과장된 것이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김우찬 고려대 교수는 “재벌 계열사의 70% 이상이 비상장임에도 불구하고 다중대표소송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주주가 손해를 보더라도 보전해 주지 않겠다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지적했다. 다만 초기엔 모회사가 자회사의 지분 50% 이상을 보유한 경우로 한정해 단계적으로 도입할 것을 제안했다.

실행과제3. 공정거래법 집행에 경쟁 원리 도입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공정위의 전속 고발권 폐지 여부는 문제의 일각에 불과하다. 법 집행의 모든 측면이 공정위의 자의적 판단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갑을관계로 일컬어지는 하도급 거래에서 억울한 일을 당한 협력업체가 할 수 있는 일은 공정위에 민원을 제기하는 것뿐이다. 공정위가 무혐의 처분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피해자가 법원에 호소할 길조차 막혀 있다. 공정위가 제재하더라도 ‘솜방망이’ 과징금 부과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1980년 공정위가 만들어진 뒤 기업의 불법행위에 대해 검찰 고발이 이뤄진 비율은 1%가 채 안 된다.

그래서 공정위의 전속 고발권을 폐지해 누구나 고소·고발할 수 있도록 하자는 요구가 나왔다. 그러나 공정거래법의 모든 조항에 형사처벌이 규정돼 있는 현 상황에서 전속 고발권을 폐지하면 남소가 우려된다는 반발도 만만치 않다. 그 결과 2013년 7월 검찰총장은 물론 감사원장·중소기업청장·조달청장 등에게 고발요청권을 부여하는 타협이 이뤄졌다. 하지만 이들 기관이 실제 고발 요청을 한 경우는 매우 적다. 감사원은 한 차례도 없다. 이상승 서울대 교수는 “공정위가 공정거래법 집행에 관한 전권을 갖고 있어 피해자 구제나 경쟁촉진 효과가 떨어진다”며 “담합처럼 중대한 시장질서 교란행위에 대해선 전속 고발권을 폐지하되, 나머지는 과징금 등 금전적 처벌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아가 피해자가 직접 법원에 위법행위의 금지를 청구할 수 있게 하고 징벌적 손해배상소송의 대상을 확대해 당사자끼리 민사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분과장인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불투명하고 취약한 기업 지배구조를 개혁하지 않고선 장기적 경영 안정과 효율적 자본시장 형성이 이뤄질 수 없다” 고 강조했다.

나현철 기자 tigerac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