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우울증을 잡아야 막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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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생활고를 비관해 자식들과 동반 자살한 주부, 게임광으로 현실도피를 위해 자살을 선택한 명문대생, 대북사업 수사에 대한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뛰어내린 정몽헌 회장 등 사연도 다양하다.

경찰청 조사에 따르면 하루 평균 36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있다. 10년 전에 비해 두 배 이상 늘어난 수치다. 2002년에만 1만3천여명이 자살로 숨졌다. 자살 기도자는 통상 자살자의 10배 가까이 되므로 국내에서만 해마다 10만여명이 한두번 자살을 꿈꾸고 있다는 뜻이다. 자살이 늘고 있는 배경과 대책을 알아본다.

◆자살의 뿌리는 우울증이다=겉으로 볼 때 자살의 원인은 다양하다. 신병 비관과 경제적 궁핍 등 생계형 자살에서 고독과 허무, 정신적 중압감 등 실존형 자살까지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나 이러한 자살 동기는 모두 도화선일 뿐 자살의 원인은 아니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대부분의 사람이 사는 쪽을 택하기 때문이다. 자살 밑바탕에 깔린 근본 원인은 우울증이다.

미국 CNN 창업자 테드 터너와 영화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 다이애나 영국 왕세자비도 자살 충동에 시달린 적이 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들 모두 우울증 치료제를 복용한 경험이 있다.

그러나 도화선에 해당하는 촉발 인자를 무시해선 안된다. 최근 자살이 늘고 있는 이유는 우울증 환자가 갑자기 늘어서라기보다 사회.경제.문화적으로 자살을 부추기는 환경이 조성됐기 때문이다. 상대적 빈곤의 가중과 불황으로 인한 생활고, 기계 문명의 확산과 가족의 붕괴로 인한 인간소외 현상이 모두 자살 급증의 중요한 배경이다. 미디어의 잇따른 자살 보도도 잠재적 자살자의 자살 충동을 부채질할 수 있다. 모방심리 때문이다. 최근 투신자살의 유행은 이런 심리적 '전염'과 무관하지 않다.

◆우울증은 뇌의 병이다=우울증은 가족의 사망과 질병.실직.실연 등 특별한 이유가 없어도 찾아온다. 뇌에서 분비되는 세로토닌이란 신경전달물질의 농도가 떨어지면 생긴다. 남성은 평생 10명 중 1명, 여성은 5명 중 1명 꼴로 크고 작은 우울증에 시달린다. 가벼운 우울증은 치료를 받지 않아도 좋아질 수 있지만 심한 경우 자살로 이행된다.

중증 우울증 환자의 15%가 자살을 시도한다. 우울증은 말 그대로 이유없이 슬픈 병이다. 의욕이 없고 말이나 활동량이 줄어든다. 오락이나 레크리에이션.교제 등 무슨 일을 해도 흥이 나지 않는다.

현대 정신의학에선 대부분의 우울증을 약물로 치료한다. 정신과 의사의 상담과 분석 등 정신치료는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약물요법의 효과가 탁월하기 때문이다. 프로작과 졸로푸트.세로자트 .팍실 등 세로토닌 농도를 올려주는 치료제(일명 해피 메이커)가 사용된다.

환자의 80%가 효과를 본다. 우울증 환자들은 약물 거부감을 없애는 것이 중요하다. 전문가들은 감기가 호흡기에 생긴 병인 것처럼 우울증은 뇌에 생긴 병이므로 약물치료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지적한다. 최근 팍실 등 일부 우울증 치료제가 오히려 자살 충동을 유발할 수 있다는 보고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의사의 판단 아래 실보다 득이 크다면 복용하는 것이 옳다.

◆충동적 자살도 있다=자살의 20% 정도는 우울증과 무관한 충동적 자살이다. 누군가에게 마음 속에 응어리진 억울함을 표출하기 위한 강력한 수단으로 자살을 선택한다.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보이고자 자살하는 것도 여기에 해당한다. 이 경우 자살 기도자는 우울증에서 비롯된 자살 기도자와 달리 대부분 무의식적으론 생에 대한 강렬한 애착을 보인다.

◆자살의 전조 증상에 주목하자=우울증이 원인이든, 충동적 자살이든 자살은 전조 증상을 보인다.

자살자의 80%는 어떠한 형태로든 자살 수개월 전부터 경고 사인을 보낸다. 가족이나 친구가 해야 할 일은 이들의 고백을 절대 가볍게 여겨선 안된다는 것이다.

정답은 이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정신과 전문의를 찾는 것이다. 특히 급성 우울증은 불과 며칠 사이 시기를 놓쳐 자살로 이어지기도 하는 초응급 질환이다. 강제로 격리 조치하는 것도 필요하다.

실제 수년 전 국내 굴지의 대학병원 모교수는 우울증 진단을 받은 바로 다음날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의사를 만나기까진 창문을 막고 칼 등 날카롭고 뾰족한 물건을 치우는 등 자살 방지를 위한 배려가 필요하다.

홍혜걸 전문기자.의사 <esther@joongang.co.kr>
사진=최승식 기자 <choissie@joongang.co.kr>

도움말=대한정신과개원의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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