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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객의 맛집] 백탄 두 번 구운 참숯 위에서 익는 장어…부산 스타일 쪽파무침과 멋진 조화

중앙일보

입력

| 정신과 의사 윤대현의 ‘왕자장어’


성게알+아나고회로 식욕 돋운 뒤
기름장·초장·깻잎·김치 곁들여 한입
꽃게 한 마리 넣은 라면으로 마무리

살집이 통통한 숯불 장어구이.

살집이 통통한 숯불 장어구이.

무언가를 불 위에서 지글지글 구워 먹고픈 날이 있다. 불 위에서 구워 먹기에 딱 좋은 삼겹살·곱창이 당겨서일 수도 있고, 따뜻한 불 앞에서 술 한 잔 기울이며 ‘인생이 무엇인고’ 떠들 친구가 그리워서일 수도 있다. ‘마음 맞는 사람과 맛있는 것 먹을 때 사람은 가장 행복하다’란 말, 일리가 있다. 먹어야 생존할 수 있기에 우리 뇌는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큰 쾌감을 얻도록 설계돼 있다. 먹는 것이 학교 공부처럼 괴로운 일이라면 인류는 생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먹는 것으로 배고픔은 채울 수 있지만 외로움은 채울 수 없다. 외로움은 결핍의 감정이기도 하지만 타고난 본능이기도 하다. 우리는 인생 내내 우정과 사랑에 갈증을 느낀다. 외로움의 유전자를 갖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마음이 지쳤을 때 사람들과 옹기종기 불 앞에 둘러 앉아 무언가를 구어 먹는 집이 더 당기는 것 같다. 좋은 사람과 함께 먹다 보면 배도 부르고, 더불어 마음도 덜 허전해지는 경험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무언가를 구워먹고 싶던 어느 날, 가 볼만 한 곳이 없나 검색 사이트를 뒤지던 중 신사동에 있는 ‘왕자장어’ 잡이 눈에 들어왔다. 장어구이 전문점이었다. 내친 김에 얼른 찾아 나섰다. 가게는 카페와 레스토랑이 가득한 도산공원 뒤편 작은 골목에 살며시 숨어 있었다. 큰 길에서는 간판도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 느낌이 오히려 좋았다. 미니 여행을 온 느낌이랄까. 10미터 남짓한 작은 골목에서 발견한 동그란 간판이 정겨웠다. 작은 골목에 숨어 있는 음식점 문을 열고 들어설 때, 잠시 나를 복잡한 현실에서 폭신하게 격리시켜 주는 듯 했다.

들어가 보니 숯불을 올려놓을 수 있는 4인용 테이블 7개가 있는 깔끔한 인테리어의 가게였다. 급한 마음에 장어구이부터 생각하고 주문하려는데 사장님이 “구이를 드시기 전에 ‘우니(성게알) 한 판 + 아나고(붕장어)회 반 접시’ 조합부터 먼저 먹어보라”고 추천했다. 김 위에 성게알과 장어회, 겨자를 함께 올려서 한입에 쏙 넣어 먹는 조합인데 별미였다.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에서처럼 코스 요리로 음식이 나오는 건 아니었지만 지글지글 뜨거운 장어 숯불구이를 본격적으로 먹기 전, 식욕을 돋울 깔끔하고 차가운 전체음식을 먹는 느낌이 들었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장어 숯불구이다. 서른 살의 미남 청년 사장님이 직접 구워줬다. 나도 얼마 전까지 서른 살이었는데…. 중년 남자의 아쉬움을 아는지 뜨거운 숯불은 작열하듯 피어올랐다. 사장님의 설명을 들어보니 백탄을 두 번 구운 참숯이라고 했다. 먹기도 전에 흐뭇해졌다. 구이는 역시 불이 좋아야 한다.

사장님이 정성껏 구워준 장어를 맛보는데, 이것이 나름 먹는 방법이 있다. 이집 메뉴판에 적어놓은 ‘왕자장어의 장어를 맛있게 드시는 법’이다. 첫 번째 방법은 장어를 기름장에만 찍어 먹는 방법이다. ‘장어에서 육즙이 툭 터져 나왔다’는 표현은 맞지 않겠지만 부드러우면서도 탄력 있는 식감의 장어를 씹을 때마다 담백한 즙이 흘러나왔다. 질 높은 깔끔한 맛이었다. 고향이 부산인 사장님은 10년 전부터 요식업 일을 했고, 3년 전 좋은 장어구이를 서울에서도 맛보게 하고 싶어 이곳에 장어구이 전문점을 냈다고 한다. 질 높은 장어는 흑산도와 충남 쪽에서 가져 온단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식재료 좋고, 불도 좋으니 장어 맛이 좋을 수밖에 없다. 거기에 독특한 전체요리에 밑반찬들도 훌륭하다.

이어서 두 번째 방법을 시도해봤다. 기름장에 찍은 장어를 특제 초장에 찍고 김치 위에 올려 청양 고추나 생강과 함께 먹는 방법인데 이것도 별미였다. 다소 느끼할 수 있는 장어를 새콤달콤한 초장이 함께하며 균형을 잡아 주었다. 요즘 나름대로 조금 먹으려고 노력 중인 터라 장어가 남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웬걸, 접시 위 장어가 마구 사라지고 있었다.

마지막 방법은 깻잎을 뒤집어서 김치를 얹고 여기에 기름장과 초장을 찍은 장어를 올리고 쪽파무침과 함께 먹는 것인데, 특히 쪽파무침과의 조화가 훌륭했다. 쪽파와 멸치를 섞어 만든 부산 스타일의 반찬인 쪽파무침은 은근히 중독성이 있다. 다음에 가면 세 번째 초식으로 먼저 시작해야겠다.

그날의 만남은 신년회식 겸 업무 내용을 상의하는 것도 한 목적이었는데, 분위기 때문인지 해야 할 일 이야기는 잊어버리고 자연스레 삶의 애환을 공유하며 서로의 지친 마음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시간을 갖게 됐다. 뇌 안에 일하는 시스템과 지친 마음을 재충전해주는 시스템이 따로 존재한다는 주장이 있다. 심장 박동수를 내가 임의로 조정 못하듯, 일하는 시스템을 잠시 끄고 재충전 시스템을 켜는 것도 내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어 스트레스 관리가 어렵다는 얘기다. 잘 구운 장어 한 조각 덕분에 ‘맛있는 음식과 만남’이 재충전시스템에 시동을 거는 훌륭한 열쇠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꽃게 한 마리를 통째로 넣어 끓이는 꽃게라면.

꽃게 한 마리를 통째로 넣어 끓이는 꽃게라면.

장어구이를 다 먹고선 왕자장어의 피날레 ‘꽃게라면’으로 마무리를 했다. 찌그러진 양은냄비에 꽃게 한 마리를 넣고, 일반 라면이 아닌 생면을 넣고, 라면 스프 없이 진하게 국물을 만드는 게 포인트다. 앉은 자리에서 완벽한 해장까지 이루어지는 셈인데, 한마디로 깔끔한 마무리다. 우리 일행은 재충전은 물론이요, 이른 해장까지 마치고 나니 머리가 개운해져서 업무적인 상의도 5분 만에 깔끔히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장어구이는 즐겨 먹던 아이템이 전혀 아닌데, 왕자장어에는 자주 가게 될 것 같다.


왕자장어


주소: 강남구 신사동 646-16 1층(언주로164길 35-4)
전화번호: 070-4418-2551
영업시간: 오후 5시~밤 11시, 일요일 휴무
주차: 발렛파킹
메뉴: 붕장어구이 2만5000원, 붕장어회 4만2000원, 꽃게라면 2만2000원
드링크: 소주 5000원, 맥주 5000원, 화요17도 1만9000원, 햇복분자 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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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현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라이프스타일 의학에 관심이 많다. 현대인들의 맛집에 관한 관심은 음식 맛뿐 아니라 공감에 대한 그리움에서 비롯됐다고 믿기에 늘 새로운 맛집을 열심히 찾아다닌다. 가격과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도전하는 ‘노력형 미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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