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와 양보로 지혜롭게 접근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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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자나깨나, 앉으나서나, 동서남북, 남녀노소, 빈환도이 모두 「민주」다.
정치마당에선 권력을 쥔자나 권력을 좇는자가 다같이 민주를 말하며, 권력과는 인연이 먼 「한표」시민들도 너나없이 민주를 말한다.
산업현장을 가면 기업주가 민주를 말하고, 근로자가 또 민주를 주장하며, 학교에 가면 스승과 제자가 함께 민주를 외친다.
참으로 「민주」 는 1987년 오늘 한국과 한국민의 지상명제가 되었다.
6·29대전환을 계기로 민주가 현실의 목표로 가시권에 접근하면서 일기 시작한 민주에의 열정과 기대는 온 사회 각 분야에 넘치고 있다.
전국을 훱쓴 노사분규의 소용돌이 속에서 잇따라 「민주노조」 가 생겨났고 그 파장은 각계로 확산중이다.
심지어 어느 대학에서는 「민주동문회」 까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선거를 앞두고 각 정당 출마예상후보자들은 또 저마다 「민주」의 선봉을 다짐하며 집권후의 화려한 공약을 펼쳐 보이느라 바쁘다.
이들의 공약을 듣고 있노라면 민주화만 되면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들이 일시에 눈녹듯 다 풀릴것만 같다.
빈곤도, 격차도, 소외도, 갈등도, 억압도 모두 사라지고 자유와 평등과 풍요가 넘쳐흐르는 신천지가 바로 눈앞에 열리는 듯한 착각조차 불러일으킨다.
과연 그럴까. 그럴수 있을까.
마치 만사해결 마법의 주문같이 어디나 얹혀지는 「민주」 외 관사와 민주에 대한 맹목의 열정, 무한대의 기대에 오히려 한가닥 걱정을 갖게 된다.
진실로 순조로운 민주발전을 위해서는 이쯤해서 모두가 한번쯤 민주와 민주화가 오늘의 우리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을 정리해보아야 할것 같다.
민주주의는 말하는 사람과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내포할수도 있는 매우 다의적인 개념이다.
좁게는 특정의 정부형태, 넓게는 일종의 생활양식으로까지 이해된다. 공산주의조차 「민주」 를 표방하고 있는 상황은 「민주」 가 얼마나 폭이 넓고 애매하고, 때로는 상충될 수도 있는 개념인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우리사회의 「민주」홍수속에서도 이같은 민주의 다의성에서 연유하는 개념의 혼선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여당은 마치 단임이행 정부이양을, 야당은 군부독재종식 정권교체를, 경제인들은 민간주도 자율을, 근로자들은 노동운동의 자유와 분배의 공정을, 교육계에선 학원자율화를, 일부재야· 운동권은 「민중민주주의혁명」실현을 민주의 핵심이자 목표로 이해하고 추구하는듯한 인상이다.
이 모든 것이 각 분야에서 민주적가치와 제도의 일면일수는 있어도 그것이 바로 민주는 아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민주가 갖는 보다 핵심적 의의는 의사결정 과정의 다수참여 보장과 여론의 지배라고 해야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사회민주화의 현 단계가 길게는 40여년, 짧게는 26년「군부통치」 기간에 사회 각분야를 지배해온 「권위주의」 를 청산하는 전환의 것 걸음이기 때문이다.
권위주의 지배체제하에서의 각종 제도와 운영을 어떻게 바꾸느냐하는 민주의 내용은 민주적 절차와 의사결정 과정을 통해 앞으로 결정될 과제이지 아직은 이것이다 하고 말하기는 이르다.
실제로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언론 각분야에서 민주화는 원칙의 합의뿐 실질내용의 합의는 골격형성에 그쳤거나 현재로선 없는 상태다.
또 이러한 민주적 제가치외 실현은 단순한 제도의 개편으로 얻어질수 있는것이 아니다.
경제, 사회발전의 단계와 맞춰 시간을 두고 차근 차근 추구해갈 목표이지 단김에 고지점령하듯 성취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인류의 이상이지만 역사상 「완성된 모습」으로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고 현재도 존재하지 않는다.
끊임없는 모색과 실험의 과정이 현실에서의 민주주의의 모습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것이다.
직선제 정부이양으로 정치분야에서 민주화의 첫 목표를 성취한다해도 그것은 더 힘겨운 과정의 시작일 가능성이 크다.
복지와 번영과 갈등의 해소가 저절로 이루어질 수는 없고 오히려 더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참여의 폭발은 결국 의사결정 과정에서 보다 많은 시간과 비용과 정력을 필요로 할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나 독단의 내용규정은 현 단계에서 민주화의 장애가 될 가능성이 많다.
지나친 기대는 흔히 환멸의 반동으로 역전되기 쉽다.
최근 어느 운동권 단체의 유인물에서 『민주화가 되면 ○○은 준엄한 심판을 받을것』 이라고 특정 대상을 비판·매도한것은 이런 점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정면의 오해인것 같다.
민주를 하겠다면 먼저 상대방의 존재와 의견을 존중할줄 아는 범용이 전제가 된다. 아집을 버리고 매선에 만족할줄 아는 타협의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민주의 이름으로 민주를 부정하는 자가당착은 없어야겠다.
인내와 양보로 합의 안된 최선보다 합의된 매선에 지혜롭게 접근하는 자세를 이제라도 가다듬어야할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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