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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중심으로 교육과정 바꿨더니 학교가 살아났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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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호 14면

[4차 산업혁명 시대] 교육 안 바꾸면 미래 없다 

임진택 경희대 책임입학사정관은 올해 대입 수시모집에서 2000여 개가 넘는 전국 고교의 학교생활기록부(학생부)를 접했다. 학생부는 한 학생의 3년간 교육활동을 볼 수 있는 기록이다. 임 책임사정관은 “모든 학교가 비슷비슷한 것 같지만 다 그렇지는 않다”며 “올해 입시에서 경기도 용인시 흥덕고·포곡고는 확실히 달랐다”고 말했다. 이 두 학교는 올해 대입 수시모집에서 서울대 합격자를 냈다. 고려대·연세대를 비롯한 선호 대학에도 다수의 학생을 입학시킨 경기도 혁신학교다.

학종 돌풍 일으킨 흥덕·포곡고 #기초 부족한 학생 ‘1학년 3학기’ #개인 수준별 맞춤 교육으로 결실 #교사에 자율권, 학교 규제 줄여야

2010년 등장한 혁신학교는 대입과 무관한 학교가 아니냐는 평가를 받았다. 대입 수시모집에서 학생부종합전형(학종)이 대세로 떠오르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그렇다고 이들 학교의 대입 실적이 대단한 정도는 아니다. 다만 모든 학교를 규정하는 기본 틀(교육과정)에서 자유롭다. 교육과정이란 교육부가 전국 초·중·고교가 학생에게 가르쳐야 할 지식의 내용, 가르칠 방법을 정해 놓은 공식 문서(커리큘럼)를 말한다. 교육부는 총론과 각론을 정해 이를 시·도 교육청과 학교에 보낸다. 또한 교육과정을 근거로 해 교과서를 제작하고, 여기에 근거해 가르치게 한다.

16일 경기도 용인시 흥덕고에서 장병국 교장과 보직교사들이 업무 회의를 하고 있다. 강홍준 기자

16일 경기도 용인시 흥덕고에서 장병국 교장과 보직교사들이 업무 회의를 하고 있다. 강홍준 기자

교육과정 재구성하는 학교들

올해 흥덕고를 졸업해 국민대 자동차공학과에 수시모집(학종)으로 합격한 황재성(18)군은 입학 당시 중학교 내신성적이 166점(200점 만점)이었다. 경기도에서 공부 좀 한다는 소리를 들으려면 중학교 내신이 190점은 넘는 게 보통이다. 게다가 황군은 고교 수학을 따라가기 힘든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 학교는 기초가 부족한 학생은 1학년 때 일반 학생처럼 2학기제가 아니라 3학기제를 운영한다. 수학책도 중학교 과정을 담은 ‘기초수학’을 쓴다. 평가도 기초가 부족한 학생들끼리 따로 한다. 수준별로 맞춤형 교육을 하는 것이다.

황군은 1년간 기초반에 들어가 두각을 드러냈고, 3년 내내 학교 진로시간에 동료 학생들과 팀을 만들어 자동차 모형 제작, 설계 등을 했다. 그는 “다른 학교에 갔으면 포기했을 텐데 흥덕은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흥덕고는 교육과정의 큰 틀은 지키되 학교 사정에 맞게 이를 재구성했다. 박현석 교감은 “학생을 중심에 두고 교육과정을 새롭게 구성한 다음 수업을 학생 참여 중심으로 바꾸고, 평가도 여기에 맞게 과정 중심으로 바꿨다”고 말했다.

포곡고에서도 교사들의 교육과정 재구성 작업은 활발하게 이뤄진다. 의지가 있는 교사 한 명이 하는 게 아니라 교과 교사들이 뜻을 함께해 밀고 나간다. 3학년 문과 학생들에게 ‘지구과학1’ 과목을 가르치는 박성은 교사는 학기 시작을 앞두고 지구과학 교육과정을 새로 짰다. 고3 문과생은 수능에서 과학 과목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래서 보통 문과 고3의 과학 수업은 자습시간이나 수면 보충시간으로 전락하기 일쑤다.

“과학독서토론으로 수업을 바꾸려고 해요. 학생들이 토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지 과정을 평가하고, 지필고사는 보지 않는 대신 논술로 치르려고 합니다. 아이들에겐 학창 시절 마지막 과학수업인데 의미 있는 시간이 되게 해야죠.”(박성은 교사)

한국은 지난해 말 발표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35개국을 포함해 72개국에 대한 ‘국제 학업 성취도 평가(PISA)’에서 과학 과목에 대한 흥미?즐거움이 회원국 평균 이하라는 성적표를 받았다. 3년 전 조사에서도 점수는 높지만 흥미나 즐거움이 낮은 현상은 마찬가지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홍선주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선행교육예방연구실장은 “국가 관리하에 전국 초·중·고교에 동일한 국가교육과정을 적용하는 한국의 표준화는 모든 학생에게 균등한 교육을 제공하는 데 기여한 측면이 있으나 개별 학습자에게 최적화된 학습 경험을 제공하는 데 부족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인공지능(AI)을 핵심으로 하는 기술이 미래 사회를 바꿔놓을 것으로 예상되면서 전 세계 국가가 교육과정을 개정하고 있다. AI가 대체할 수 있는 개별 지식이나 기술을 학교가 가르치기보다 문제 해결 능력이나 창의적 사고, 협업 같은 역량을 키워줘야 한다는 내용이 각 국가의 교육과정에 담겨 있다.

한국에선 ‘2015 개정 교육과정’이 내년부터 초·중·고교에서 본격적으로 시행된다. 교육과정 총론엔 학교가 키워줘야 할 핵심 역량 여섯 가지(자기관리 역량, 지식정보처리 역량, 창의적 사고 역량, 심미적 감성 역량, 의사소통 역량, 공동체 역량)이 제시돼 있다. 이런 역량을 키우기 위해 학교는 교과 특성에 맞는 다양한 학생 참여형 수업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교육과정·수업·평가는 하나다

김덕년 경기도교육청 교육과정정책과 장학사는 “교육과정 총론 내용을 보면 온갖 미사여구가 담겨 있다. 그런데 왜 그게 학교에서 실현이 안 될까. 문제의 핵심은 교육과정 따로, 수업 따로, 평가 따로 각자 간다는 데 있다”고 말했다.

“교사가 학생의 흥미를 유발하는 수업을 하겠다고 마음먹는다고 하자. 이를 위해선 학생이 수업에 참여할 수 있게 교육과정을 재편성해야 한다. 그런데 이걸 교사 혼자 할 순 없다. 동료 교사의 동의와 협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수업을 하더라도 평가는 중간·기말고사 같은 지필고사로 끝낸다면 학생들이 수업 자체에 의미를 두기 어렵고,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학원으로 간다. 이처럼 교육과정과 수업, 평가, 기록은 하나다. 이걸 인식해야 수업 하나를 바꿀 수 있다.”

수업과 평가가 따로 놀면 그 부작용은 학생에게 돌아간다. 교육부가 최근 일부 과목을 제외하고 모든 과목에서 지필평가 대신 수행평가를 할 수 있게 허용했다. 그런데 수행평가를 과제평가로 부과하면 수행평가는 학부모 숙제가 된다. 수업 과정은 학생부 기록에 고스란히 반영돼야 하는데 이게 안 되니 교사가 학생에게 학생부에 들어갈 내용을 써오라는 주문을 하기도 한다.

주석훈 미림여고 교장은 “지금까지 공교육의 기본 틀은 모든 학생이 똑같은 내용을 배워 동일하게 평가받는 것이었다”며 “앞으론 학생 개개인이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도록 학교와 교사가 도와주고 여기에 맞는 역량을 키워줄 수 있도록 공교육의 틀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학교와 교사가 학생의 관심과 흥미에 맞게 학습 내용을 재구성하고, 가르치는 방법과 평가 방법을 고민해 적용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교육부나 시·도 교육청 역시 이를 지원하는 역할로 바뀌어야 한다.

취재팀: 강홍준 사회선임기자, 강기헌 기자
자문단: 권대봉 고려대 교수(전 한국직업능력개발원장), 김도연 포스텍 총장, 김세움 한국노동연구원연구원(노동시장), 김진영 건국대 교수(경제학), 김태완 한국미래교육연구원장(전 한국교육개발원장), 김희삼 GIST 교수(기초교육학부), 박준성 교육부 기획담당관, 이민화 KCERN(창조경제연구회) 이사장(혁신), 이주호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전 교육부 장관), 이혜정 교육과혁신연구소 소장(교육학), 이화진 한국교육과정평가원 부원장(교육과정), 정제영 이화여대 교수(교육학), 정철영 서울대 교수(산업인력개발), 최영준 연세대 교수(행정학), 한유경 이화여대 교수(교육학) ※가나다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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