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무대 데뷔 틸러슨, 한국 언론에 허락한 시간은 39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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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리스마 넘치는 세계적인 석유 재벌이지만, 언론을 대할 때는 ‘부끄럼쟁이’였다. 16일(현지시간) 독일 본에서 열린 주요20개국(G20) 외교장관회의를 통해 국제 무대에 공식 데뷔한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 이야기다.

이번 행사에선 정·관계에서 일한 경험이 없는 그가 보여줄 첫 퍼포먼스에 전세계의 시선이 쏠렸다. 수많은 나라 장관들이 그를 만나기 위해 줄을 서다시피 했다. 그의 일정에 따라 대부분 양자회담 일정이 조율됐다. 이번 행사를 앞두고 “지구가 틸러슨 중심으로 돈다”는 말이 외교가에서 나왔을 정도다.

그런데 언론을 대하는 태도는 예상 밖이었다. 통상 외교장관 간 양자회담을 할 때 회담 모두 부분을 언론에 공개한다. 취재진이 먼저 대기하는 가운데 장관들이 입장하고, 카메라 플래시를 받으며 악수를 한다. 이후 회담을 주최한 호스트 국가 장관이 먼저 환영하는 모두발언을 하고, 다른 쪽 장관이 모두발언을 한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간단한 질의응답이 이뤄지기도 한다. 그런 뒤 비공개로 전환하고 본격적인 회담이 시작되면서 취재진은 퇴장한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당초 한국 취재단은 외교부 대변인실을 통해 이날 오후 4시50분으로 예정된 한·미 외교장관회담을 시작할 때 윤 장관과 틸러슨 장관의 모두발언까지 취재할 수 있다고 공지를 받았다. 한·미 회담에 앞서 열린 미·프랑스 외교장관회담이 길어지면서 회담 개시도 늦어졌다.

취재진이 곧 한·미 회담이 시작될 것이란 이야기를 듣고 회담자에 들어선 것은 5시6분. 그런데 이미 틸러슨 장관이 모두발언을 시작한 뒤였다. 이후 취재진에게 허락된 시간은 5초였다. 틸러슨 장관이 “그것은 중요한 주제다. 우리가 할 이야기가 아주 많다”란 두 문장을 말한 뒤 미 국무부 직원들은 한·미 취재진을 내보냈다. 앞의 이야기를 듣지 못해 중요하다는 ‘그것’이 북핵 문제인지, 한미동맹인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뒤이어 열린 한·미·일 외교장관회담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이어졌다. 윤병세 장관의 제의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까지 세 장관이 함께 악수를 하며 사진을 찍었고 취재진에서 틸러슨 장관을 지목한 질문이 나왔다. “최근 북한의 도발에 어떻게 대응할 생각이냐”, “일본에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를 배치할 것인가”였다. 하지만 틸러슨 장관은 웃기만 할 뿐 답하지 않았고, 미 국무부 직원들은 곧 한·미·일 취재진을 퇴장시켰다. 이번에는 34초가 걸렸다. 틸러슨 장관이 두 차례의 회담에서 한국 취재진에게 허락한 시간은 39초뿐이었다.

한국과의 회담에서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앞서 오전에 열린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와의 회담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고 한다. 블룸버그 통신은 ‘불평등한 틸러슨과 라브로프의 첫 만남’이란 제목의 기사로 상황을 전했다. 라브로프 장관이 먼저 모두발언을 했고, 취재진으로부터 받은 질문에도 답했다. 그런데 틸러슨 장관 차례가 되자 미국 측이 기자들을 내보냈다. 당황한 라브로프 장관이 “왜 저 사람들이 아무 말도 못하게 했느냐”고 물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 외교가 소식통은 “틸러슨 장관이 미디어 샤이(media shy)한 모습을 보이는 경향이 좀 있는 것 같다. 미국 국내 언론도 이를 지적하곤 하더라”고 귀띔했다. 보통 다자행사에선 장관들이 소수의 호텔에 나눠 묵기 때문에 같은 숙소를 쓰는 경우도 많은데 틸러슨 장관은 아예 본이 아닌 외곽 지역에서 숙박했다고 한다.

낯선 미 국무장관의 모습이지만, 아직 그에 대한 평가를 내리기는 이르다는 평가다. 틸러슨 장관의 이런 ‘부끄러움’이 의전 등 형식보다는 효율성을 중시하는 기업인으로서의 특성 때문인지, 아직 외교 수장이란 자리가 낯설기 때문인지는 두고 볼 일이기 때문이다.

본=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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