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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싸는 공직사회 엘리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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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조민근 JTBC 경제산업부 차장

조민근
JTBC 경제산업부 차장

연초 산업통상자원부의 A실장이 관료 생활을 접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기자는 귀를 의심했다. A는 산업부 내 명실상부한 ‘에이스’였다. 현안이 있는 곳엔 늘 그가 투입됐고, 이내 깔끔하게 마무리하곤 했다. 승진도 빨라 주변에선 ‘너무 잘나가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다. 그런 그가 지난해 갑작스럽게 병가를 냈다. 건강 문제보다는 정책을 두고 상관과 마찰을 빚은 게 계기였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한 달여 자리를 비운 끝에 결국 사표가 수리됐다. 한 후배 관료는 “이참에 공직을 떠나고 싶다고 얘기하더라. 사실 예전부터 민간으로 가고 싶다는 얘기를 종종 하곤 했다”며 전후 사정을 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엔 기획재정부 출신의 B국장이 민간 기업으로 옮겨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역시 대외경제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엘리트였다.

관료들의 민간행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하지만 최근엔 유난히 잦고, 핵심 엘리트들이 빠져나간다. 행정고시 성적 상위자들이 모인다는 기재부에서도 국제금융국은 대표적 선호 부서다. 업무가 전문적인 데다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WB) 근무 등을 통해 글로벌 네트워크를 쌓을 수 있어 엘리트들이 몰린다. 하지만 지난해에만 국제금융국 출신의 국장과 과장이 잇따라 민간 기업으로 이직했다. 통상·환율 전쟁을 대비해 각국이 관련 조직을 정비하고, 민간의 인재까지 끌어들이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공직사회에선 거꾸로 인력 유출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심각한 건 이들의 이직 사유의 밑바탕에 공통적으로 ‘공직사회에 대한 회의’가 깔려 있다는 것이다. 한국 경제가 민간 주도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관료의 위상이 축소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대통령은 여전히 ‘제왕적’이고, 국회는 ‘무소불위’가 됐다. 둘 사이에 치여 관료는 최소한의 직업적 명예마저 지키기 어려워졌다. 대통령의 한마디에 부처가 이미 공표한 원칙이 허물어지기 일쑤고, 의원 보좌관이 부처 국장을 불러 “자세가 뻣뻣하다”며 호통을 치기도 한다. 특히 최순실 게이트와 이어진 탄핵 정국에서 공직사회가 입은 ‘내상’은 깊고, 넓다. ‘이러려고 대통령이 됐나 자괴감이 든다’는 말을 들은 한 경제부처 과장은 “이러려고 밤낮없이 일했나 하는 생각에 우리는 자괴감 정도가 아니라 억장이 무너진다”며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흔들리는 정부와 관료를 다독여야 할 사람은 현재로선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다. 하지만 그의 행보를 보면 슬금슬금 오르는 지지율에 더 신경이 쓰이는 듯하다. 장·차관들도 납작 엎드린 채 정치권 눈치만 살핀다. 황 대행이 대선 출마를 결심할 경우 바통은 다시 유일호 경제부총리에게 넘어간다.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무총리 직무대행 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라는 전무후무한 직함이 생길 판이다. 정부가 얼마나 더 희화화돼야, 공무원의 자부심은 얼마나 더 뭉개져야 우리 사회가 이를 돌아보게 될까.

조민근 JTBC 경제산업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