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한국 외교는 멈추고, 기업들은 매 맞는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2면

한국 기업이 힘의 논리에 휘둘리고 있다. 강대국의 보호무역주의와 안보주의에 떠밀려 사업을 접거나 울며 겨자 먹기로 공장을 짓는다. “정부가 방패 역할에 해줘야 한다”는 주문이 나오는 이유다.

중국 사드 보복 와중에 … 롯데, 베이징 적자 매장 3곳 폐쇄 검토

롯데마트는 중국에서 운영 중인 수퍼 3곳의 폐점을 검토 중이다. 2012년 문을 연 베이징 안전차오(安貞橋)점의 모습. [사진 롯데마트]

롯데마트는 중국에서 운영 중인 수퍼 3곳의 폐점을 검토 중이다. 2012년 문을 연 베이징 안전차오(安貞橋)점의 모습. [사진 롯데마트]

롯데마트는 중국 베이징 인근 롯데슈퍼 세 곳을 문 닫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3일 밝혔다. 이는 한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에 대한 중국 정부의 보복과 무관하지 않다. 롯데 관계자는 “사드 문제가 중국 내 사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측면이 없지 않다. 이런 분위기에선 실적 개선이 어렵다고 판단된 세 매장을 서둘러 정리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롯데는 1994년부터 롯데백화점 등 22개 계열사가 중국에서 사업을 펼치고 있다. 지난해 사드 문제가 불거진 뒤 롯데마트·롯데케미칼·롯데제과의 중국 법인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강도 높은 세무조사와 소방점검을 받으며 “중국 사업이 위기에 봉착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그렇다고 중국 에서 발을 빼기도 어렵다. 국내 면세점과 백화점의 주요 고객이 중국인인 데다 지금까지 중국에 투자한 돈만 10조원에 달하기 때문이다.

트럼프 압박에 … 삼성·LG, 인건비 비싼 미국에 공장 신설 준비

윤부근 삼성전자 소비자가전부문 대표(맨 앞)가 지난해 9월 인수한 미국 가전회사 데이코의 LA 공장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 삼성전자]

윤부근 삼성전자 소비자가전부문 대표(맨 앞)가 지난해 9월 인수한 미국 가전회사 데이코의 LA 공장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 삼성전자]

트럼프의 “고마워요 삼성(Thank you, Samsung)” 트윗으로 압박을 받고 있는 국내 가전업계도 미국 내 공장 부지 후보를 좁혀나가는 등 공장 설립 준비에 부산하다. 가전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와 앨라배마주를, LG전자는 테네시주를 유력 공장 후보지로 압축했다. 익명을 요구한 삼성전자 가전부문의 관계자는 “지난달부터 ‘사우스캐롤라이나에 공장을 짓는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며 “100원 팔아 5원 남길까 말까 한 가전 산업이 관세 같은 대형 리스크를 모른 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민간외교 네트워크 총동원해
기업이 입는 피해 최소화해야”

LG전자 측은 “상반기 중으로 미국 공장 설립에 대한 청사진을 밝힐 계획이다. 80% 정도 검토 작업이 완료됐다”고 언급해 사실상 공장 설립을 기정사실화했다.

미국 가전 공장 설립은 울며 겨자 먹기 선택이다. “계산기를 아무리 두드려도 답이 안 나올 것”이란 게 시장 분석이다. 시장조사기관 트레이딩이코노믹스에 따르면 지난달 기준 미국의 시간당 평균 임금은 21.84달러. 멕시코의 평균 일당(318.65페소, 15.59달러)보다도 높다. 공장 건립비용까지 감안하면 5% 안팎의 가전 영업이익률로 감당하기 힘든 수준의 투자가 될 전망이다.

하지만 마냥 손 놓고 있기엔 미국 시장이 너무 크고 중요하다. 조명현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만약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탈퇴와 30% 수준의 국경세 부과가 현실화한다면 한국 가전업계는 가격 경쟁력을 크게 잃을 것”이라며 “통상 압력에 대비해 업체들로선 트럼프 행정부에 장단을 맞추는 시늉이라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강대국의 무리한 요구를 적절히 막아줄 수 있는 ‘외교 방패’가 아쉽다고 입을 모았다. 온기운 숭실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의 외교적 노력이 사실상 멈춘 상황이어서 기업들이 보는 피해가 더 커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최병일(한국국제통상학회장)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도 “정부가 힘을 잃은 이때엔 민간 역량을 총동원하는 게 중요하다”며 “조직력에 기반한 ‘물리적 외교’가 아닌 네트워크를 활용한 ‘화학적 외교’에 주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미진·장주영 기자 miji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