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영 칼럼] 장삿속과 민족애 사이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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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트럼프 놀이에 베거-마이-네이버(beggar-my-neighbour) 게임이 있다. 상대의 패를 다 따서 글자 그대로 거지로 만들면 이기는 경기란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위해 1919년 베르사유에서 회담이 열렸는데, 여기서 미국.영국.프랑스 등 전승국들은 엄청난 배상금 부과로 독일을 작살낼 요량이었다.

독일의 부담 능력은 분할 상환을 해도 20억달러 정도인데 가장 '인자한' 영국조차 2백40억달러를 내밀었기 때문이다. 그때 케인스가 나서 독일이 거지가 되면 배상금 수취는커녕 유럽도 같이 거지가 된다고 일갈했다.

*** 수지타산이 안맞는 금강산 사업

베거-마이-네이버 게임을 경제학자들은 '근린 궁핍화' 정책이라고 우아하게 번역한다. 근자에 어느 재계 인사가 부메랑 효과를 겁내는 일본에 "우리 소득이 1천달러일 때 당신들이 얻은 것이 많았소, 1만달러일 때 얻은 것이 많았소?"라고 설득해 중요한 한.일 협력 프로젝트를 성사시켰단다.

우리의 궁핍한 근린도 이 지혜를 빌릴 만하다. 예컨대 "우리 소득이 7백달러인 지금 당신들이 얻을 것이 많겠소, 7천달러로 늘어날 장래에 얻을 것이 많겠소?" 하고 묻는다면-그것도 북한이 물어온다면-남한은 어찌할 터인가? 그 대답이 쉽지 않을 것은 경제보다 정치 부메랑과 군사 부메랑 걱정이 크기 때문이리라.

그럼에도 나는 7백달러보다는 7천달러 소득의 북한이 훨씬 우리에게 유익하다고 믿는다. 어차피 통일이 민족의 장기 과제라면, 남북 모두 부자가 됨으로써 전쟁 따위는 어서 잊어버리는 것이 상책이다. 부자가 될수록 싸움 좋아하는 나라도 있지만, 한반도의 남과 북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

베르사유 회담 결과에 케인스는 엄청 뿔이 났던 모양이다. 영국과 프랑스의 지도자도 별 볼일 없지만, 이 참에 독일과 유럽에 본때를 보이려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을 "세계 제일의 사기꾼"이라고 씹어댔기 때문이다.

경제 문제를 정치적 감정으로 풀지 말라는 케인스의 충고를 깔아뭉갠 유럽은 결국 20년 뒤에 또 한차례 세계 대전을 벌인다. 남북 경제 협력에 어떤 사기극이 있고 누가 사기꾼인지는 모르겠으나, 정치가 경제의 숨통을 죄는 장면은 숱하게 눈에 띈다.

그 경협에 대해서도 어려운 동족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 북한의 해석이라면, 남한의 해석은 원조와 장사로 갈라진다. 무상이나 무상에 가까운 지원은 정부의 몫이고, 한푼의 이익을 따지는 장사는 기업의 몫이라는 것이다. 금강산 관광 사업의 실패는 이 혼선에서 싹텄다.

6년간 9억4천만달러의 입산료 지급 등 도무지 수지맞을 수 없는 사업을 수지 타산이 생명인 기업이 떠맡고 나섰기 때문이다. 개성공단만 해도 평당 39만원의 분양가는 주변 국가들보다 크게 높아서 경쟁력 수판질이 필요한 형편이다.

이제라도 가르치자. 남한 기업은 민족애로 장사하는 것이 아니라 수익성으로 장사한다는 사실을! 정부가 여행 경비까지 보태주면서 바람을 잡는데도(?) 손님이 준다면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러니 북한이 장애물을 치워줘야 한다.

관광객이 혹할 상품을 만들어 수지를 맞추고, 그래서 '남한 기업 궁핍화'를 막아주는(!) 것이다. 문 열면 '모기'들어온다고 꺼려서는 장사를 배우지 못한다. 문은 열되 모기장으로 막는 궁리도 있으니…. 장삿속을 버리고 민족 교류의 상징으로 정부가 직접 나서는 방법도 있다.

제 돈으로 하라면 관광공사도 마다할 테니 억지로 민간기업의 등 떠미는 일은 없어야 한다. 중앙정부 예산의 1%를-1조원 이상을-대북 지원에 쓰자는 제의가 나오는 판에, 명분과 방법만 떳떳하다면 수학여행 경비 보조 따위는 문제도 아니다. 그 떳떳한 명분 제공은 물론 북한의 몫이다.

*** 민간기업 등 떠미는 일 없었으면

최근 한 기업인이 억울한 죽음을 맞았다. 금강산 적자에, 대북 비밀 송금에, 비자금 조성 혐의까지 경제 원론을 깡그리 무시한 '남북 정치'의 폭력이 빚은 비극이었다. 그래서 "특검의 칼에 의한 타살"이라는 북쪽의 비난보다 "협박 흥정의 희생"이라는 외지의 보도가 더 그럴 듯하게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악연과 악순환의 고리를 어서 끊자. 장삿속이 민족애에 앞서는 이 '빌어먹을' 현실을 나는 정말 통탄하지만, 그래야만 남북이 궁핍화를 면한다는 설득은 수락하지 않을 수 없다.

정운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