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분규 장기화|기업들 부도막기 바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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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2백70억원을 하루만 지원해 주십시오.』
지난달 24일 하오7시. A은행 심사담당상무방에서 노사분규로 휴업중인 B전자 자금담당 Y상무가 사색이 된 얼굴로 매달리며 하소연이다.
B전자는 만일 A은행이 지원을 안해주면 이날자로 부도가 날판이다. 은행입금 마감시간은 이미 2시간30분이나 지났건만 이날 결제해야할 자금 2백70억원을 마련 못했으니 목을 맬수밖에 없다.
결국 A은행은 타입대(타은행발행 당좌수표를 담보로 하룻동안 대출해주는 것) 형식으로 2백70억원을 지원해 B전자의 부도를 막았다.
○…이같은 절박한 상황은 비단 A은행과 B전자 사이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노사분규로 휴업중인 기업들이 대부분 겪고 있는 상황이다. 휴업으로 생산이 중단돼 돈은 안들어 오는데 물품대·이자등 고정비용은 계속 나가야하기 때문이다.
은행은 은행대로 매일 중역회의를 열어 주거래업체의 자금사정을 체크하느라 법석이다.
B그룹은 노사분규이후 당좌대월한도 (예금잔고가 없어도 어음결제를 해주는 한도) 를 다 찾아 쓰고도 모자라 일시대 형식으로 지원받은 자금이 자그마치 6백80억원이나 된다.
다른 대기업들도 사정은 대동소이하다. 당좌대월한도를 다 찾아쓰고도 모자라 업체당1백억원씩 일시대를 대부분 쓰고 었다.
노사분규가 있기전에는 대기업들의 경우 자금여유가 있어 당좌대월한도의 45∼50%정도만 써왔었다. 그만큼 요즘 자금사정이 어렵다는 얘기다.
○…상업어음할인도 마찬가지다. 기업들은 일정한 한도내에서 상업어음을 은행에서 할인, 상환기일전에 돈을 찾아쓰는데 종전에는 할인한도의 70∼80%정도 할인하는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할인한도를 다찾아써도 자금이 모자라는 실정이다.
은행은 은행대로 여신한도(DC)를 초과했기 때문에 이를 줄이느라 고심이다.
거래선의 사정은 딱한데 자금은 회수하라니 지점장들만 죽을 지경이다.
C은행 이모지점장은 『총통화 18%는 죽을때 싸갖고 가려하는 것이냐』며 통화당국을 원망하기까지 했다.
일선에서 부대끼는 은행 점포장의 입장에선 기업의 연쇄부도로 신용공황이 와도 총통화목표만 지키면 되는 것이냐는 볼멘 항변이다.
○…대기업들이 이모양이니 중소기업은 더 말할게 없다.
담보능력은 부족한데다 대기업처럽 힘도 없어 대출받기가 쉽지않다. 대기업은 최악의 경우『부도낼테면 내보라』며 배짱도 부리지만 중소기업은 그럴수도 없다.
중소기업인들은 은행본점은 감히 생각도 못하고 지점에 나타나 여신담당자나 지점장에게 애타게 하소연을 한다.
서울구로동 S밸브는 종업원1백80명, 매출액 50억원인 자동차엔진 밸브제조 중소기업.
최근 이같은 사정으로 M은행구로지점을 찾았다.
자체분규도 없던 건실한 기업이지만 자동차3사의 휴업으로 납품길이 막혀 자금난에 부딪친 선의의 피해자다.
사장 이모씨는 긴급자금 1억원을 지원받아 간신히 부도위기를 넘겼다.
M은행 구로지점장은 『S밸브는 재무구조·사업전망등이 좋아 선뜻 지원해줄수 있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부분의 중소기업의경우 대출금을 회수못하면 지점장이 책임을 져야하기때문에 지점장들은 『사업전망이 불투명한 중소기업은 사실상 지원요청을 외면할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업계나 금융계에선9월부터 서서히 중소기업의 연쇄도산현상이 나타날수 밖에 없을것이라고 걱정하고 있다.
○…노사분규장기화에 따른 이러한 기업자금난은 한국은행의 창구에도 나타나고 있다.
노사분규가 집중된 마산·울산·인천지점에 지난달 2O일부터 시중은행을통해 중소기업들의 자금지원요청이 쇄도하고 있다.
울산지점은 시중은행을 통해 6개사에 6억원을 이미 지원했고 3개사 6억원은 심의중이며 무역금융 93억원의 상환연기조치를 취해 주었다.
마산지점은 74개사에 22억1천만원을 지원했으며 42개사가요청한 42억2천만원은 심의중이다. 무역금융상환연기액은 10억원.
인천지점은 7개업체에 14억2천만원을 지원했으며 15개업체 31억원은 심의중이다.
무역금융 10억원의 상환연기도 허가했다.
한은본점은 4백억원의 무역금융상환연기를 승인했으며 심의중인 금액도 7백억원이나 된다.
○…노사분규와중에 중앙대재단의 부도마저 겹쳐 사채시장은 마비상태.
이때문에 단자·은행창구가 막혀 사채시장에 의존하던 기업들은 자금난으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 상태다.
사채금리는 지난 6, 7월만해도 A급이 월1.3∼1.4%수준이었는데 최근에는 월1.6∼1.7%까지 치솟았다.
은행창구가 통화관리 때문에, 단자창구는 수신감소와 통화안정증권인수로 대출이 안되는 상황에서 노사분규마저 겹치자 그동안 사채에 의존해온 일부한계기업들은 사채마저 여의치 않으니 죽을 지경이다.
이러한 자금난 때문에 시중금리가 급등, 기업의 신용도에따라 다르지만 기업의 실제부담금리는 평균 14∼15%수준이고 한계기업들은 연리17∼19%나 된다고 한다. 꺾기식 양건예금때문이다.
단자사들이 연리19%짜리 타입대나 사채등으로 조성한 자금을 재원으로 대출하니 금리가 높아질수밖에 없다.<이석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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