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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려라공부] "수재, 11~16세 때 결정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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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 1.

고3인 나영이(가명)는 요즘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부모를 조르고 있다. 그러나 부모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두르고 있을 뿐이다. 나영이가 그동안 숱하게 장래 희망을 바꿔왔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는 교사.간호사 등을 꿈꾸다 중학교 땐 배우가 되길 원했고 이후 댄스 가수, 카지노 딜러, 회계사가 되겠다고 했다. 전폭적으로 도왔던 부모도 이젠 두 손, 두 발을 다 든 상태다.

나영이가 디자이너가 되려는 이유는 단순했다.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하기 어렵잖아요. 전문적인 기술을 가지면 취직하긴 쉬울 거예요. 예체능계는 더구나 합격선이 낮잖아요."

나영이의 성적은 현재 최하위권. 나영이는 사실 초등학교 때부터 보습학원에 다녔다. 중학교 때부터는 명문 학원에 등록했다. 발레와 수영, 피아노와 첼로, 컴퓨터, 골프 등…. 이 모든 걸 할 줄 알았지만 어느 것 하나에도 관심을 보이진 않았다. 부모는 어떤 분야든 나영이의 실력이 처진다고 생각되면 더 나은 강사, 더 잘 가르치는 학원을 찾았다.

나영의 요즘 일과는 이렇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5시30분에 일어나 6시30분까지 등교 준비를 하고 이후 학교로 향한다. 오후 7시까지 정규수업과 자율학습을 한 뒤 오후 8시부터 10시까지 학원에서 과외 수업을 받는다. 11시 무렵 돌아와 인터넷 채팅을 하다 자정쯤 잠자리에 든다. 나영이 스스로 공부할 시간은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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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 2.

한국에서 중2까지 다니다 영국으로 유학한 형일이(가명). 한국에서 영어를 배웠지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좋은 수학 성적 덕분에 사립중학교에 입학한 그는 매주 2시간씩 별도로 영어지도를 받았다. 스스로 언어 문제를 극복해야 한다고 여겨 공부에 집중했다.

학교 수업은 오후 3시30분에 끝났다. 방과 후 학교에서 2시간씩 그날 배운 내용을 복습했다. 집에 돌아와서도 3~4시간씩 자습했다. 그는 "참고서가 체계적으로 잘돼 있어서 자습하는 게 오히려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복습과 자습을 중심으로 한 형일이의 공부는 계속됐고 유학 3년 만에 치른 고교 졸업 국가학력고사(GCSE)에서 수학.물리 등에서 좋은 성적을 냈다. 영어만 보통 수준이었다. 스스로 흡족했던 형일이는 2년간의 대학입시반에서도 하루 14시간씩 공부했다. 우리 수능 격인 A레벨 시험에선 최상위권 성적을 거뒀고 의대에 진학할 수 있었다.

옥스퍼드대에서 20여 년간 교육심리학을 가르쳐온 정미령 교수는 "누구나 수재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세계적인 교육심리학자인 그는 보통 대중교육서와 달리 아이의 지능과 재능이 11세부터 16세 사이에 가장 발달하며 이 시기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아이가 수재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된다고 말한다. 그는 "아이가 공부의 중요성을 깨닫고 스스로 목표를 정해 관리할 수 있는 나이가 돼야 제대로 공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상담을 통해 많은 아이를 영국 명문대에 진학시켰다. 한국에서의 상담 경험도 있다. 최근 '평범한 10대, 수재로 키우기'를 낸 그와 전화 인터뷰를 했다.

-누구나 수재가 될 수 있다는 근거는.

"수재는 자기가 가지고 태어난 특징을 독특한 강점으로 잘 키운 사람을 말한다. 일렬로 쭉 세워 키를 재는 게 아니라 각자의 능력이 잘 발휘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선 누구나 수재가 될 수 있다."

-11세에서 16세가 왜 중요한가.

"아이가 자기 인생을 스스로 관리할 수 있게 되는 나이이기 때문이다. 물론 공부의 시작은 4, 5세 때부터 자연스럽게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아이가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또 시간 개념에 따라 공부할 수 있는 나이는 이때다."

-적절한 시기(적시.適時)란 무슨 의미인가.

"나무를 가꿀 경우엔 물을 줄 때, 가지를 칠 때, 비료를 줄 때의 타이밍을 잘 맞춰야 한다. 그래야 잘 자란다. 아직은 묘목인데 마음만 앞서 필요 이상의 물과 비료를 준다면 오히려 뿌리가 썩을 수도 있다. 부모의 역할도 마찬가지다. 가장 적절한 시기에 아이의 능력을 살피고 그 능력을 길러 주는 것이다. 적절한 시기는 아이가 호기심을 보일 때다. 그때 잘 이끌어야 한다. 열 살 이전엔 부모가 방향을 제시하면 60%쯤은 그대로 된다. 나머진 아니다. 아이에게 가장 좋은 건 아이에게서 발견되는 걸 보아가며 도와주는 것이다. 모르겠다면 골고루 시켜보는 것도 방법이다."

-한국에서도 지도한 경험이 있다고 들었다.

"(한국에서는) 아이가 스스로 시간 관리를 할 수 없었다. 목표를 정해 공부하고, 그 목표를 완성했는지 자기가 점검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한 시간 공부했다면 그걸 제 것으로 만들 시간이 필요한데 많은 학생이 학교나 학원을 밤 늦게까지 돌아다니기만 한다. 스스로 인생을 설계할 나이에 타의에 끌려다니기만 한다."

-한국의 부모들에게 조언한다면.

"정상적으로라면 아이가 잘하는 과목이 있으면 그걸 더 잘하게 해서 리더가 되도록 해줘야 한다. 못 하는 과목엔 시간을 더 줘서 끌어올리게 하면 된다. 아이 스스로 하게 한다. 그런데 한국의 부모들은 무조건 과외를 시킨다. 타성에 의해 재능을 보이는 듯 여겨질 순 있다. 그러나 자연적 재능이 아니기 때문에 언젠가 깨진다. 아이의 개성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다양한 분야의 인재가 많이 나온다."

고정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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