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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에 지쳐 '모성 정치'선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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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내전과 독재로 큰 상처를 받은 국민은'엄마 같은 대통령'을 원했다." 최근 아프리카 라이베리아와 남미 칠레에서 여성 대통령이 잇따라 당선된 까닭에 대한 뉴욕 타임스(NYT) 23일자 분석은 독특하다. 신문은 "두 나라는 내전과 독재로 얼룩진 과거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며 "양국 국민은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여성이 더 적임자라고 봤다"고 전했다.

신문에 따르면 두 사람은 과거의 여성 지도자들과 다르다. 마거릿 대처 영국 전 총리나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전 총리 등은'남성 같은 여성'이었다는 것이다. 대처 전 총리는 '철의 여인'으로 불렸고, 메이어도 강인한 인상을 심어줬다.

그러나 엘런 존슨 설리프(67) 라이베리아 대통령과 미첼 바첼렛(54) 칠레 대통령 당선자는 이들과 다른 면모를 보였다. 두 사람은 선거에서 '여성적인 미덕'을 내세웠고, 그게 먹혔다.

설리프 대통령은 선거에서 '엄마 엘런'이란 이미지를 심기 위해 주력했다. 그건 16일 취임사에서도 잘 나타났다. 그는 라이베리아를 "엄마의 따뜻한 손길이 필요한 아픈 자식"에 비유했다. 선거 보도를 하던 서방 기자들은 설리프가 '엄마''할머니'라는 표현을 쓰자 당황스러워했다. 여성 정치인들을 '엄마 같다''할머니 같다'라고 말하는 걸 금기시하는 서방의 풍토 때문이었다. 하지만 라이베리아 국민은 설리프의 비유를 환영했다. 갈기갈기 찢긴 라이베리아에 평화를 심고, 국민 분열을 치유할 적임자로 그를 선택한 것이다. 그는 1980년대 독재자 새뮤얼도 정권에서 두 번 투옥됐다. 처형 위기도 간신히 넘겼다. 그런 그가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자고 하자 국민은 그에게 신임을 보낸 것이다.

칠레의 바첼렛도 피노체트 군부 독재의 희생자였다. 공군 장성이던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고문으로 사망했고, 그 역시 모진 고문과 망명 생활을 겪었다. 그래서 그는 "과거를 하나도 잊지 않고 있다"고 말해 왔다. "나는 천사가 아니다"라는 말도 누차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과거의 고통 때문에 누군가에게 앙갚음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는 " 우리 국민이 다시는 그런 세상에 살지 않기를 바란다"며 화해와 평화를 선거운동의 슬로건으로 삼았다. 그런 그를 국민은 선택했다. 3월 취임하는 바첼렛은 운도 좋은 편이다. 경제가 활기를 띠고 있고, 정치도 안정돼 있기 때문이다. 반면 설리프는 아주 나쁜 환경에서 출발했다. 14년간의 내전으로 도로와 학교, 병원 등 사회 기반시설이 모두 파괴된 데다, 폭력도 사라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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