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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엎자, 청와대 경호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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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신용호 기자 중앙일보 편집국장
신용호 정치부 부데스크

신용호
정치부 부데스크

박근혜 정부 초기 때다. 봄볕이 좋았던 날, 한 청와대 비서관이 경내 산책에 나섰다. 녹지원을 지나 본관 쪽으로 향할 무렵이었다. 귀 뒤로 이어폰을 꽂은 경호원이 어디선가 다가오더란다. 그러곤 “대통령님 나오십니다. 비켜주십시오”라며 길을 막아섰다. 산책하려던 비서관은 당황했다. 하지만 아무 말도 못했다. 그는 사석에서 그날을 회상하며 “내가 대통령을 어떻게 할 것도 아니고, 아니 비서관이 대통령을 그렇게라도 만나 소통도 하는 거 아닌가”라며 불만을 표했다.

대통령 나오면 참모 산책도 막는 경호실
‘소통 청와대’ 되려면 본관 집무실도 없애야

박정희·전두환 시절, 경호실의 위세가 대단했다는 얘기를 굳이 꺼낼 필요는 없겠다. 경호의 힘은 여전히 유효하다. 대통령 안전을 내세운 경호의 명분은 모든 것을 압도한다. 실제 대통령의 외부 일정은 사실상 경호실이 처음과 끝을 관장한다. 대통령의 안전을 위해 필요하고 그래야 할 일이다. 하지만 그게 일상화되면서 권력이 된다. 청와대 수석들도 경호실이 반대하면 대통령 일정을 짤 수 없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경호상 어렵다”고 하면 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호실 눈치를 보는 비서실이 생기는 거다. 과도한 경호는 대통령의 동선을 통제하며 소통을 막는다. 청와대 내부에선 “청와대 주인은 경호실”이란 말도 있다. 대통령은 5년마다 바뀌지만 경호실은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는 뜻으로 그렇게 얘기한다. 이건 경호실의 자부심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교만의 낌새가 읽힌다.

청와대 전경. [중앙포토]

청와대 전경. [중앙포토]

박근혜 정부는 경호실의 간을 더 키웠다. 차관급이던 경호실장을 장관급으로 승격시켰다. 비서실과 별도 조직이 됐다. 당연히 경호실은 대통령 비서실장(장관급)의 통제권을 벗어난다. 청와대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여권 핵심 관계자는 “경호실은 대통령이 비공개로 누구를 만나는지 다 안다. 자기들끼리 내부 정보를 공유해 경호실장에게만 보고한다”며 “이 때문에 경호실 정보보고가 핵심 중에 핵심이란 말이 있다”고 전했다. 최순실 사태를 겪으며 경호실 폐지론이 나오는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 비선 실세들이 ‘보안 손님’으로 드나든 것에 대해 경호실도 책임이 전혀 없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선주자들은 경호실 개혁을 공약해야 한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경호실 폐지를 약속했다. 경호실 대신 경찰청 내 경호국을 만들겠다고 했다. 그가 경호실 문제를 먼저 고민하고 대안을 내놓은 것은 긍정적이다. 다만 폐지만이 능사인지는 고민해봐야 한다. 또 비대해질 경찰 권력은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지방을 다니느라 정신없는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나 문 전 대표와 양자대결을 주장하는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도 고민해 대안을 내놔야 한다.

대선주자들은 본관 집무실 없애기도 공약해야 한다. 비대해진 경호 권력과 함께 본관 집무실은 대통령의 소통을 막는 양대 걸림돌이기 때문이다. 청와대 본관은 경복궁 근정전을 닮은 궁궐이다. 내부도 근엄함 그 자체다. 2층에는 대통령 집무실과 부속실이 전부고, 1층에는 충무실·세종실로 불리는 회의실과 접견실 등이 있다. 평소 휑하고 넓은 공간에 경호원 몇몇이 왔다 갔다 할 뿐이다. 소리를 크게 내면 큰일 날 것 같은 딱 그런 분위기다. 집무실은 30평이 넘고, 입구에서 대통령 책상까지 거리가 15m다. 더 심각한 건 참모들이 근무하는 위민관과의 거리가 300m를 넘는다는 점이다. 본관은 청와대 내 섬이다. 백악관이 좋은 예다. 백악관은 대통령과 참모들이 수시로 얼굴을 맞대고 협의하는 구조다. 집무실이 비서실장실·자문관실 등과 함께 있다. 백악관 같은 구조라면 최순실의 출입이 가능했겠는가.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피자를 배달시켜 참모들과 토론을 벌이다 “대학생 MT 같다”는 비판을 받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부럽다.

우리는 소통이 간절한 4년을 보냈다. 경호는 과도하면 폐단을 낳는다. 권력이 되고 소통을 막는다. 지금의 경호실은 바뀌어야 한다. 본관 집무실을 없애야 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집무실은 참모들이 있는 위민관으로 옮겨야 한다. 그게 어렵다면 위민관 옆에 새 건물을 지어서라도 대통령은 본관을 떠나야 한다. 이번 대선이 기회다. 대선주자들은 정신 차리고 공약해야 한다. 새 대통령이 자연스레 소통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 이번엔 좋은 대통령 한번 볼 수 있게 말이다.

한국 청와대 구조

한국 청와대 구조

미국 백악관 구조

미국 백악관 구조

신용호 정치부 부데스크

※제목 중 '뒤엎자'는 전복하자는 뜻보다 개혁하자, 철저히 바꾸자라는 의미가 담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