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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의 경제 성적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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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동호 기자 중앙일보
김동호 논설위원

김동호
논설위원

박근혜를 포함해 역대 대통령은 11명이다. 이들의 핵심 과업은 두 가지, 안보와 민생이다. 결국 국민이 안심하고 잘 살게 하는 것이다. 대통령들은 좌충우돌하면서도 대체로 옳은 방향으로 나갔다. 이승만은 시장경제의 주춧돌을 놓았고 박정희는 중화학 기반의 수출 진흥으로 기초체력을 다졌다. 전두환은 이를 토대로 꼭 30년 전 1인당 국민소득 3000달러 시대를 열었다.

구조개혁 골든타임 놓치면서 성장동력 훼손
손상 복구하려면 정치 안정 외 백약이 무효

노태우는 커지는 경제 규모에 맞춰 KTX·인천공항·서해안고속도로 같은 산업 인프라를 확충했고 북방외교로 경제영토를 넓혔다. 김영삼은 금융실명제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으로 경제의 선진화를 추구했다. 김대중은 외환위기를 수습한 뒤 정보통신기술(ICT) 혁명에 올라탔다. 노무현은 자유무역협정(FTA) 확대와 지역 균형발전 정책으로 또 한 단계 끌어올렸다. 이명박은 미국발 금융위기를 수습했다. 이 오랜 여정에서 잘못도 많았다. 부정선거와 군사독재, 외환위기가 있었고, 개발연대식 발상의 4대 강 사업에 골몰하느라 산업구조 개편의 골든타임을 놓치기도 했다.

모든 게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경제는 앞으로 뻗어나갔다. 국민소득은 이제 3만 달러 문턱에 와 있다. 역대 대통령들이 앞장서고 국민이 땀 흘린 덕분이다. 국민은 4년 전 박근혜에게도 큰 기대를 걸었다. 할 일도 정해져 있었다. 산업 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맞춰 경제 체제의 혁신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선 1987년 체제의 한계를 극복해야 했다. 누적된 적폐를 해소하고 비효율을 걷어내야 했다. 그래야 저출산·고령화에 대처하고 끊어진 계층사다리를 이어 힘 빠진 성장동력을 다시 활성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거품이 됐다. “내 그럴 줄 알았다”는 ‘후견지명(後見之明)’이 아니다. 처음부터 석연찮은 용인술과 효과가 의심되는 정책 결정이 꼬리를 물었다. 국정 운영의 첫 단추는 그가 수정안을 거부해 출범하게 된 정부부처의 세종시 체제를 안착시키는 것이었는데, 운영의 묘조차 살리지 못해 정부 시스템은 작동 불능에 빠졌다. 장차관에게 물어보면 “대통령은 보고서를 읽고 정책 지시를 내린다”고 했다. 애초부터 경제 컨트롤타워는 작동 불능 상태였던 것이다.

그렇게 4년이 흘렀고, 박근혜노믹스는 이제 윤곽을 다 드러냈다. 경제 각 분야는 중국에 덜미를 잡혔고 지난해 실업자는 100만 명을 돌파했다. 취업준비생 62만 명을 포함하면 실질실업률은 더 높아진다. 하지만 박근혜는 지난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자화자찬만 했다. 국내총생산 순위가 2013년 세계 14위에서 2015년 11위로 상승했고, 국가신용등급이 일본을 앞질렀다면서…. 그나마 노무현-이명박 정부의 벤처 암흑기를 해소해 창업 생태계가 어느 정도 복원된 정도가 성과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과연 한국 경제의 실상은 어떤가. 비정규직은 물론 인턴 한 명 모집에도 수십 명이 몰려드는 청년 취업난은 국가와 기업의 일자리 창출 능력 상실을 의미한다. 재작년부터 올해까지 3년 연속 2%대 저성장 터널에 갇혀 있다. 헬조선이란 자조를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성장동력이 꺼져가고 있다는 신호들이다. 주력업종인 조선·해운·철강 분야의 체력이 고갈되면서 한국의 해안 지역은 줄줄이 러스트 벨트로 바뀌고 있다. 자동차와 스마트폰도 중국에 쫓기는 처지다.

대통령이 팔짱만 끼고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간 무역투자진흥회의를 10차례 열어 신산업 활성화의 관건인 규제 혁파에 나섰다. 하지만 허탕만 쳤다. 공무원의 복지부동을 깨지 못했고 국회의 발목 잡기를 넘어서지 못했다. 결정적인 원인은 국정 운영 능력 부족이었다.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로 드러났듯 소통과 설득의 리더십이 없었다.

박근혜의 실패가 남긴 대가는 가혹하다. 국가 경제가 성장동력을 잃고, 경제의 기둥인 기업이 규제의 덫에 갇혀 변화에 대응하는 골든타임을 놓치게 만들었다. 게다가 정경유착 의혹이 불거져 검찰 수사에 난도질당하면서 기업의 신뢰는 바닥에 떨어졌다. 실업률을 비롯해 한국호가 기울고 있다는 경고음이 사방에서 울려 퍼지고 있지만 속수무책이다. 문제는 정치 안정 없이는 상처받은 한국 경제의 회복은 백약이 무효라는 점이다. 어떻게 해서든 이 혼란이 하루빨리 끝나는 기적이 일어나기만 빌 뿐이다.

김동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