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귀한 줄 몰랐던 것들, 달걀만이 아니었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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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박진석 경제부 기자

박진석
경제부 기자

어린 시절 종이에 계란을 그릴 때면 늘 동그라미를 그린 뒤 내부는 비워뒀다. 계란은 흰 색이라는 게 상식이었던 시절이라, 칠해도 태가 나지 않는 흰 색 크레파스를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어미 닭의 분변이 일부 묻어있던 계란은 색채 대비 때문에 그 흰 빛깔이 더욱 도드라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 계란의 색깔이 바뀌었다. 갈색 계란이 점점 세력을 넓히더니 급기야 시장을 점령해버렸다. 품종 개량 덕택에 갈색 계란 어미 닭의 생산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라는 학술적 설명이 뒤따랐다.

추억 속의 존재였던 그 흰색 계란이 다시 등장했다. 14일 인천공항 뒷마당에 부려진 대형 포장 속에서 하얀 계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유년 시절 친구를 다시 만난 듯한 반가움이 일었다. 하지만 오래는 아니었다. 3000만 마리의 가금류 대학살과 이에 따른 국산 계란 부족 사태에 대한 임시방편으로 들여온 것이기 때문이다. 한 알에 300원이라는 가격도 기자의 추억몰입을 방해했다.

‘계란 파동’의 와중에 우리는 매우 흔해 귀한 줄 몰랐던 계란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디 계란뿐이겠는가. 기자가 대학에 진학할 때만 해도 일자리는 매우 흔한 것이었다. 어지간한 4년제 대학을 나오면 대기업은 쉽게 들어갔다. 실업자가 100만 명을 넘고, 청년 실업률이 9.8%에 달하는 시대가 오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고속성장기에는 경제성장률이 소중하다는 사실도 몰랐다. 올해는 성장률 2%를 사수할 수 없을 거라는 우울한 전망도 나온다. 열심히 일하면 소득이 늘어나는 게 상식이었던 시절도 상당 기간 존재했다. 하지만 이제는 “내 봉급만 빼고 죄다 오른다”는 농담이, 더 이상 농담이 아닌 시대가 됐다.

국민에게 가장 중요한 건 결국 살림살이다. 살기가 어려워진 국민은 국가를 사랑할 수 없다. 힘겨워진 세상살이에 대한 울분이 “대통령 탄핵”을 외치며 광화문에 모인 인파의 수를 늘리는 역할을 했다면 과장일까. 아닐 것이다.

맹자는 치국의 방책을 물어온 등문공에게 유항산자유항심(有恒産者有恒心)이라고 답했다. 지속적인 생산과 소득이 있어야 백성이 떳떳한 마음을 갖고 올바르게 살 수 있다는 의미다. 더 쉬운 설명도 가능하다. 영화 웰컴투 동막골에서 산골마을의 이장은 ‘영도력’의 비결에 대한 질문을 받자 강원도 사투리로 “멀 마이 메겨야지(뭘 많이 먹여야지)”라고 답한다. 국민이 계란도 제대로 못 먹는 현실에서 이 나라의 리더라는 사람이 귀담아 들어야 할 얘기다. 특히 다음 대통령 자리를 노리는 분들, 제발 새겨 듣길 바란다.

박진석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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