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족 처럼 생각해 주세요|김정희씨(31·여·구로공단내 세진전자 여사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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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요 며칠전 우리회사 생산부의 K양은 서울가리봉동 속칭「벌집」자취방에서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읍니다.
여름휴가를 맞았는데 휴가비가 없어 고향에 내려가지 못해 외롭고 슬펐던 거지요.
6년전 고향인 목포에서 고교를 졸업하고 돈을 벌기 위해 혼자 상경한 K양은 올해 25살, 미혼입니다.
5년 경력의 K양이 하루 꼬박9시간이상 컴퓨터부품 제조일을 해 받는 월급은 16만원입니다.
라디오1대와 비키니옷장, 책 몇권이 전부인 자취방월세4만원을 뺀 12만원으로 그 흔한 로션 한번 얼굴에 바르는 일없이 한달동안 먹고 입고 저축하며 고향의 늙은 홀어머니께 용돈을 부쳐드리죠. 다른 대부분의 동료들처럼….
월3만원의 주·부식비와 교통비 8천원, 각종 경조비 5천∼6천원, 그리고 재형저축3만원과 고향 노모께 부치는 2만원을 뺀 2만여원이 그녀의 한달 용돈입니다. 이돈으로 책을 사보거나 가끔 친구를 만나 코피를 마시기도 한답니다.
지난 봄 편도선염을 앓아 1주일간 병원을 다니며 3만원이나 써버렸다고 울적해하는 모습을 본적도 있읍니다.
청바지 한벌과 올봄에 동네에서 5천원을 주고산 낡은 구두·티셔츠 2벌이 그녀가 출·퇴근과 나들이때 입는 옷의 전부지만 그래도 내년말 타게되는 1백50만원의 재형저축이 있다며 자랑할땐 저도 조금 마음이 놓입니다.
그래도 우리회사의 근로조건이나 임금은 좀 나은 편입니다.
공단내 이웃 D실업에서 일하는 고향후배 A양 (21) 은 매일 11∼12시간의 격무에다 일요일마저 8시간씩 특근을 해야 수당까지 합쳐 간신히 15만원을 받습니다.
「8시간 노동」 「최저생계비보장」 등의 말은 책에나 있는 얘기지요.
퇴근후 자취방에 돌아가면 피곤해 쓰러져버린다는 A양은 해고가 두려워, 또 한푼이라도 더 받기위해 피로를 못이기면서도 매일 야근을 합니다.
S·K사등 저희 공단내 대부분 업체의 근로자들이 A양과 비슷한 형편입니다. 그래도 이것은 낫지요. 어엿이 가정을 가진 남성 근로자들도 미혼인 저희들과 큰 차이가 없는 노임으로 가장의 체면을 세워야 하는 것이 오늘 우리 근로자의 현실입니다. 하루2천4백여원의 일당을 조금 더 올려달라고 요구했다가 업주가 문을 닫는 바람에 일자리를 잃은 광주 일성섬유 근로자들의 비극은 우리 모든 근로자들에게는 남의 일이 아닌 것입니다.
전국의 사장님들, 각지에서 걷잡을수 없는 근로자들의 외침이 밤낮 없이 계속되고 있읍니다.
그동안 억제된 근로자들의 보다 나은 생활의 욕구가 「민주화」 물결을 타고 터지고 만 것입니다.
8월들어 봇물터지듯 쏟아져 나온 분규의 원인을 참으로 겸허하게 돌이켜보시기 바랍니다.
「운동권외부세력이 개입됐다」거나 「난동」이란 말로 몰아붙여 더 큰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우를 범해선 안될 것 입니다.
사태를 해결하는 길은 너무도 환합니다. 먼저 단절된 대화의 벽을 허물고 진정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근로자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더 늦기전에 진정으로 「근로자를 가족처럼 생각하려는 자세로 뛰어들어 근로조건 개선을 전제로한 솔직한 대화를 나눠야할 것입니다.
갈수록 격렬해지고 악화되는 지금의 위기는 일시적인 협상의 술수로는 결코 극복될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것입니다.
이와 함께 자신의 의사에 반해 해고된 근로자를 복직시켜야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해고 근로자는 민주투사이기보다 살기위한 최저 생활급을 요구하다 소위 「문제 근로자」로 몰려 쫓겨나간 것입니다.
근로자에게 있어 해고란 마치 사형선고와 다름없으며 해고 당한뒤 이른바 「블랙 리스트」 (해고근로자 명단) 에 올라 어디서나 취업을 거부당하고있는 동료들은 지금도 「복직」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읍니다.
이들을 다시 따뜻이 받아들여줄 생각을 해본적은 있으셨는지요.
당국은 사실상 순수쟁의마저 막아버린 현노동관계법을 노동3권등을 보장해주는 「노동자를 위한 법」으로 고쳐주십시오.
이 어려운 사태를 극복키위해서는 경영자와 근로자가 마음의 문을 열어야합니다.
사장님이야말로 저희와 한운명체이며 저희들을 위해 애쓰시는 분임을 저희들로하여금 믿을수있게 해주십시오. 그래서 사장님이 큰집에 살고 고급차를 타고 다니셔도 억울하고 미운 마음대신 오로지 존경만을 드릴수 있도록 참된 기업가 정신을 보여 주실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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