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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대신 가장 역할 하다가 벌레로 변하고 알게 된 진실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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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호 14면


“나는 나 자신도 어머니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질투한다는 것을 발견했소. 그리고 이제 이것이 초기 아동기의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소. 모든 사람은 한때 신화 속의 오이디푸스가 되는 시기를 거친다고 생각하오.”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1897년 윌리엄 플리스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이다. 『꿈의 해석』에서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을 발표한 후로, 아버지와 아들 또는 딸과 어머니 사이의 묘한 경쟁심은 곧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설명되곤 했다.


하지만 이 이론은 부모자식 간의 갈등을 전체적으로 설명하기에는 지나치게 환원론적이라는 비판을 벗어나기 어렵다. 과연 모든 소년들은 아버지를 질투하고, 모든 소녀들은 어머니를 질투하며 자라는 걸까. 그렇지만은 않다. 수많은 아이들은 부모에 대한 질투보다는 동경과 존경심을 품는 경우가 많고, 변해 가는 세상 속에서 좋은 아버지의 가치는 ‘남자다움’이나 ‘가부장적 권위’보다는 ‘친구 같은 다정함’으로 변모해 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에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평생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했다는 자책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분명 존재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주로 아들과 아버지의 경쟁 관계를 나타내는 용어였다면, 딸과 엄마의 묘한 애증 관계를 나타내는 용어는 엘렉트라 콤플렉스다. 하지만 프로이트 학파는 “그런 구별은 무의미하며 남녀 상관없이 아동기에는 부모를 향한 미묘한 경쟁과 질투의 감정을 가지게 된다는 점에서 복합적으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넘어 부모자식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법은 불가능할까. 그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보여 주는 작품이 카프카의『변신』이다. 이 소설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오이디푸스적 상황이라 느낄 만한 여지가 있지만, 아들이 아버지와 경쟁적으로 ‘어머니의 사랑’을 간절히 원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전형적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가능성을 비껴가고 있다. 아들이 원하는 것은 ‘아버지의 자리’가 아니라 아버지를 닮지 않고 살아가는 법, 아버지가 되지 않고도 한 사람의 오롯한 인간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끼던 여동생의 폭언에 희망을 잃고]
『변신』에서, 어느 날 아침 벌레로 변신해 버린 그레고르 잠자에게 가장 먼저 엄습해 오는 고통은 벌레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출근을 못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그는 벌이가 시원찮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실질적인 가장의 역할을 도맡고 있었으나, 아버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은 나다!’라는 생각을 관철시키려는 듯 더욱 심하게 가족들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벌레가 된 아들의 안부를 걱정하기보다 아들의 벌이가 끊겨 생계가 곤란해질 것을 더욱 염려한다.


그레고르는 ‘내가 돈을 벌지 않으면 가족들은 결코 버텨내지 못할 거야’라는 생각 때문에, 자신의 삶 자체를 잃어버렸다. 그레고르는 가족들이 벌레가 된 자신을 보살펴 주리라는 믿음을 한동안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벌레가 된 몸으로 힘겹게, 온 힘을 다해 잠긴 문고리를 여는 데 성공하자,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걱정과 보살핌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적대감과 공포였다.


이 소설의 아이러니는, 그레고르가 ‘벌레’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진실’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알고 보니 가족들은 그가 생각한 것처럼 완전히 무력하지 않았다. 아버지에게는 그레고르 모르게 모아 놓은 재산도 있었다. 이 사실을 미리 알렸다면, 그레고르의 부담감은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아들에게 생계를 떠맡기고 다른 가족이 모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정작 당사자인 그레고르는 몰랐던 것이다.


착한 그레고르는 이 소설에서 딱 한 번, 가족들에게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의사 표시를 한다. 그레테와 어머니가 그레고르의 방에 있는 모든 가구를 치우려 하는 날이었다. 그레고르는 어머니와 여동생이 액자를 치우려 하자, 액자 위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 한다. 이것까지 양보해 버리면 영원히 이 집안에서 그레고르의 자리, 아들의 자리, 한 인간의 자리는 없어질 것임을, 그 순간 직감했던 것이다. 그리고 온몸을 액자에 철썩 붙인 채 저항한다. 자신이 ‘벌레’가 아니라 ‘그레고르’라는 것을, 당신들의 가족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달라는 마지막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아버지의 폭력과 그레테의 폭언뿐이었다. 그레고르의 진심을 이해하지 못한 아버지는 다짜고짜 사과를 던져 그레고르의 등에 치명상을 입히고 만다. 커다란 사과가 등에 박힌 채로, 그레고르는 이제 몸조차 제대로 가눌 수 없게 되어, 병에 걸린 벌레가 되어 버리고 만다. 심지어 그가 아끼던 여동생은 이렇게 선언한다. “우리는 저것에서 벗어나야 해요.”


이제 아들도, 오빠도 아닌 ‘저것’으로 전락해 버린 그레고르는, 희망을 잃어버린다. 그때부터 음식을 거부한 채 납작하게 말라 가고, 어느 날 완전히 호흡을 멈춰 버린다. 그는 영원히 가족으로부터 그리고 인간 세계로부터 추방당한 것이다.

[부모님에게 인정받는 삶을 넘어서]
나는 어린 시절 ‘내가 아들이었다면 부모님이 나를 더 사랑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에 괴로워한 적이 있다. 아버지가 친한 회사 동료의 아들에게 용돈을 듬뿍 주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는 걸 본 뒤였던 것 같다. 목욕탕에서 아버지의 등을 밀어 주는 아들, 아버지와 함께 축구를 하는 아들, 장기나 바둑을 두며 아버지와 대화하는 다른 집 아들들을, 내 아버지도 부러워하셨다.


바둑을 좋아하시는 아버지를 위해 나도 한 번 바둑을 배워 보려 애쓴 적은 있지만, 도저히 적성에 맞지 않아 금방 그만두었다. 이것이 전형적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내게도 ‘평생 노력해도 나는 부모님이 원하는 아들이 될 수는 없다’는 좌절감이 있었다. 어머니에게 야단맞는 것은 익숙했지만, 가끔 아버지가 매를 드시거나 화를 내시면 세상이 무너지는 듯 슬프고 무서웠던 기억도 있다.


세상의 거의 모든 딸들은 ‘아버지에게 사랑받는 딸’이거나 ‘아버지의 눈밖에 나지 않는 딸’이 되기 위해 분투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나 또한 오랫동안 ‘부모님에게 인정받는 딸’이 되기 위해 안간힘 쓰던 시절이 있었다.


어느 순간 그런 나를 극복하게 만든 것은 ‘부모의 기대에 걸맞은 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뜻과 상관없이,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길’을 찾는 과정에서 느낀 희로애락이었다. 그렇게 아름답거나 대단한 길은 아니지만, 내가 원하는 삶을 찾기 위해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천천히 나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한 순간, 해방감이 찾아왔다.


어쩌면 지금도 우리는 매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조금씩은 겪고 있거나, 동시에 벗어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부모의 열망과 나의 열망을 구분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순간, 오이디푸스의 신화는 깨지기 시작한다. 만약 ‘나는 꼭 이것을 하고 싶은 것인가?’라는 질문이 우리를 괴롭힌다면, 질문해 보자. 이것은 누구의 열망인가? 진짜 나의 열망인가, 부모님의 열망인가, 아니면 미디어가 부추긴 유행과 대세의 유혹인가?


카프카의『변신』이 아직도 전 세계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이유는, 아직 우리가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날카롭게, 그러나 눈부시게 온몸으로 돌파하고 있는 그레고르를 향한 연민과 공감 때문이리라. ●


정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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