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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세 법의학자, 자기 피 뽑아 밝혔다…드들강 살인의 진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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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12일 단국대 연구실의 이정빈 석좌교수. 모니터 속은 이 교수가 ‘드들강 여고생 강간살인 사건’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활용한 여성 신체 내부 그림. [사진 김경록 기자]

12일 단국대 연구실의 이정빈 석좌교수. 모니터 속은 이 교수가 ‘드들강 여고생 강간살인 사건’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활용한 여성 신체 내부 그림. [사진 김경록 기자]

전남 나주 드들강에서 16년 전 발생한 여고생 박모(당시 17세)양 강간살인 사건의 피고인에게 법원이 무기징역을 선고한 지난 11일. 이번 사건 재수사를 맡았던 광주지검 강력부 박영빈(48) 부장검사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 부장은 정중하게 재판 결과를 알리고 깊은 감사의 뜻을 전했다. 전화를 받은 주인공은 원로 법의학자인 이정빈(71) 단국대 법학과 석좌교수였다. 그는 직접증거가 없어 난항을 겪던 박양 사건 해결에 중요한 기여를 한 인물이다.

37년 외길 이정빈 단국대 석좌교수
시신 생리혈·정액 안 섞인 기록 보고
자신의 피와 아들 정액으로 실험
움직여야 피·정액 섞인단 사실 확인
성폭행 후 현장서 살해됐다 밝혀내
이한열·장준하 감식도 한 원로
“법의학은 억울함 풀어주는 학문”

대검찰청 법의학자문위원회 위원장도 맡고 있는 이 교수가 이번 사건에 뛰어든 건 2014년. 검찰이 경찰로부터 사건을 넘겨받아 수사를 시작한 시점이다. 앞서 경찰은 2001년 2월 4일 숨진 채 발견된 여고생 박양 체내에서 발견된 성폭행 용의자의 유전자(DNA)와 김모(40)씨의 DNA가 일치한다는 대검 분석 결과를 받았다. 이를 토대로 사건 발생 11년 만인 2012년 다시 수사에 들어갔다.

사건 직후 작성된 부검의 소견에는 박양의 사망 경위가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았다. 이때 애매모호한 대목을 정리한 전문가가 이 교수였다. 이 교수는 박양 시신에서 목이 졸린 소견과 익사 소견 모두 있는 점에 주목했다. 수십 년간의 시신 부검 경험을 토대로 이 교수는 박양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누군가에 의해 강물에서 목이 졸린 것으로 판단했다.

드들강 사건을 해결한 이정빈 교수. [사진 김경록 기자]

드들강 사건을 해결한 이정빈 교수. [사진 김경록 기자]

이 교수의 이런 노력이 있었지만 김씨가 범행을 완강히 부인하면서 검찰은 별다른 소득 없이 ‘혐의 없음’ 처분을 하고 말았다. DNA 대조 결과 박양과 성관계를 맺은 것으로 나타난 김씨가 살해까지 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이유였다.

박양 가족이 재수사할 것을 탄원하면서 이 교수도 이 사건 해결에 힘을 보탰다. 이 교수는 경찰의 재수사 결과를 토대로 검경 합동수사가 이뤄진 지난해 여름 다시 한번 이 사건 수사기록을 면밀히 들여다봤다.

이번에는 박양이 언제 사망했는지를 밝히는 게 관건이었다. 낡은 서류를 여러 차례 읽어도 도무지 박양의 사망 시점을 밝힐 수 있는 자료가 보이지 않았다. 검찰에 “미안하다”는 전화를 하려던 직전 수사기록 중에서 경찰 과학수사팀이 작성한 하나의 문서가 눈에 확 들어왔다. 박양의 체내에서 채취한 용의자의 정액과 박양의 생리혈이 섞이지 않은 상태였다는 걸 보여주는 특이한 기록이었다.

정신이 번쩍 든 이 교수는 직접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혈액과 정액이 필요했다. 그러나 요청할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 결국 ‘자가 공급’을 결심했다. 자신의 팔뚝에서 직접 피를 뽑았다. 정액은 아들(38)에게 부탁했다. 의사(재활의학 전공)인 아들은 평생을 법의학에 헌신한 아버지의 열정과 취지에 공감하며 흔쾌히 실험에 쓸 정액을 제공했다. 이렇게 부자 의료인이 의기투합했다.

드들강 사건을 해결한 이정빈 교수. [사진 김경록 기자]

드들강 사건을 해결한 이정빈 교수. [사진 김경록 기자]

이 교수는 정액을 투명한 위생봉투에 담은 뒤 여기에 천천히 혈액을 넣었다. 7시간이 지나도 정액과 혈액은 섞이지 않았다. 이와 달리 봉투를 살살 움직여보니 정액과 혈액이 금세 섞였다. 박양이 성폭행당한 직후 몸을 심하게 움직이거나 이동하지 않고 현장에서 살해됐다는 추론을 가능케 한 실험 결과였다. 재판부도 이 교수의 소견 등을 토대로 ‘성폭행범이 살인까지 저질렀다’고 판단했다.

이 교수는 본지 인터뷰에서 “경찰 과학수사팀의 초동수사가 잘 됐다”고 칭찬하면서 “이번처럼 부검·감정 취지에 맞는 수사·재판 결과가 나오면 여전히 짜릿하다”고 말했다.

37년 경력의 법의학 전문가인 이 교수는 직접 실험을 중시한다. 날 끝이 휜 칼에 사람이 찔리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알아보려고 보신탕집에 공급되기 직전의 죽은 개를 칼로 찔러보기도 했다고 한다.

이 교수는 1980년대 초반부터 시국사건을 비롯한 각종 굵직한 사건의 진상 규명에 참여해 수백 구의 시신을 부검했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 연세대생 이한열씨 사망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장준하 선생 유골 감식 작업도 맡았었다.

이 교수는 “억울함을 풀어주는 법의학은 그 어떤 학문보다도 사람을 위한 학문”이라며 “법의학이 모든 사건을 해결해줄 수는 없겠지만 ‘태완이법’에 따라 살인사건의 공소시효가 없어진 만큼 시신의 상태를 정확한 글과 사진으로 기록하고 분석하면 언제라도 어려운 사건은 풀린다”고 강조했다.

광주=김호 기자 kimho@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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