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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할 만한 남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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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안혜리 라이프스타일 데스크

안혜리
라이프스타일 데스크

지난 연말의 출산지도 여진이 아직도 상당하다. 행정자치부가 굳이 친절하게 가임기 여성의 전국 분포도를 만들고 ‘대한민국 출산지도’라는 이름을 붙여 인터넷에 공개하는 통에 “여자가 (애 낳으라고 길러지는) 가축이냐, 저출산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하느냐”는 분노만 불러왔다. 사실 통계(가임기 여성 수)는 아무 잘못이 없다. 통계를 다루는 행자부 관료들의 시대착오적인 감수성이 문제였을 뿐이다. 그런데 조금만 주위를 둘러봐도 이번에 욕먹은 몇몇 공무원만이 아니라 많은 남성이 비슷한 시각을 갖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SNS에 애 안 낳는 여자는 군대를 보내라거나 세금을 매기자며 여자 탓하는 주장이 넘쳐나는 걸 보면 말이다.

저출산은 하나로 단정 짓기에 매우 어렵고 복잡한 문제지만 결혼을 아예 안 하거나 늦게 하는 여성이 늘어나는 것과 관련 있는 건 분명하다. 이미 35~39세 인구 열에 셋은 미혼(이혼 포함)이고, 특히 30대 이상 고학력 여성의 미혼율이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출산율 저하로 이어지고 있다. 미국이야 첫아이를 출산하는 산모 41%가 비혼 상태라지만 미혼모를 쉽사리 용인하지 않는 한국 사회에선 결혼부터 해야 출산을 고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또 어떤 남자는 결혼 안 하는 여자 탓을 하고 싶겠지만 이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결혼할 만한 남성이 있어야 하니 말이다. 그런 차원에서 미국엔 결혼할 만한 남성(marriageable men)이라는 통계까지 있다. 사회학자 윌리엄 윌슨이 1980년대에 내놓은 것으로, 직업·수입이 있어 가정을 부양할 수 있는 남성의 숫자를 제공한다. 브루킹스연구소는 2015년 이 개념을 바탕으로 결혼할 만한 남자의 부족현상을 분석하는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흑인과 백인 모두 유독 고학력에게서 부족현상이 두드러졌다. 자연성비는 여성보다 남성이 많지만 결혼할 만한 남자라는 개념에 대입하면 여성 100명당 85명 수준으로 떨어지고, 고학력일수록 부족현상은 더 심했다. 교육 수준이 높아진 여자들이 눈높이를 낮춰 남편을 찾느니 차라리 결혼을 하지 않기에 혼인율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여성들의 교육 수준이 높아지면서 결혼할 만한 남성 부족에 시달리고 한국에선 그게 저출산으로까지 이어지는 셈이다.

청년 실업률이 치솟는 마당에 여자가 애 낳기 위해 ‘결혼할 만한 남자’가 되라고 남자들을 윽박지른다면 얼마나 기가 막힐까. 여자들 심정도 딱 그렇다.

안혜리 라이프스타일 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