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선택적 기억상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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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나현철
나현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나현철 논설위원

나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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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쯤 금융당국 고위 관계자가 뇌물을 받은 혐의로 기소됐다. 영문도 모르고 구치소에 들어간 그는 억울함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벗어날 길은 정확한 기억뿐이었다. 어두운 방에서 기억을 짜내려 애쓰고 또 애썼다. 잊었다고 여겼던 이름과 장소들이 하나둘씩 머리를 스쳐갔다. 이러길 몇 달, 문득 공소장에 적힌 뇌물수수일에 지인과 밥을 먹었다는 게 떠올랐다. 증언을 받고 신용카드 영수증을 찾아내 무죄를 입증했다. “기억이란 게 참 신기하다”고 그는 말했다.

 요즘 인공지능(AI)만큼이나 뜨고 있는 분야가 뇌과학이다. 인간의 두뇌는 하루 3만 번이 넘는 판단을 내린다고 한다. 발 한 걸음 내딛는 것부터 그렇다. 눈으로 들어온 정보를 두뇌가 처리해 신경계를 통해 다리 근육에 명령을 내린다. 그 덕에 우리가 넘어지지 않고 걷거나 뛸 수 있다. 물론 이런 선택 대부분은 뇌리에 남지 않는다. 너무도 일상적이고 기본적인 일이기에 헛심을 써가며 기억할 필요가 없다. 안 그래도 두뇌는 항상 바쁘다. 우리 체중의 2%가량을 차지하지만 에너지의 20%를 사용한다. 무의식의 영역에서 생존을 보장하느라 두뇌는 항상 분주하다.

 그래서 5억 년 전 지구에 출현한 두뇌는 꼭 필요한 것만 기억하도록 진화해 왔다. 심리학 용어로 ‘선택적 기억’이다. 현대사회에서 사람이 하루에 접하는 광고는 1500개에 달한다. 이 중 ‘이건 광고야’라고 눈치채는 건 76건뿐이다. 기억되는 건 12건으로 훨씬 적다. 광고를 포함해 인간이 잠깐이라도 기억에 담아두는 것은 하루 500건 남짓이라고 한다. 중요한 일, 의외의 사건, 감정에 영향을 주는 자극들이다. 대부분 곧 잊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필요한 상황이 되면 신기하게 되살아난다. 전원을 끄면 사라지는 컴퓨터의 램과 달리 롬처럼 남아 있다고 해서 ‘영구기억’이라 불린다. 기억은 미래의 위협에 대비하는 일종의 생존파일인 셈이다.

 그런데 뇌과학자들은 때로 반대의 과정이 작동한다고 말한다. 생존을 위해 기억이 왜곡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자책이나 타인의 비난을 모면해야 하는 상황에서 자주 나타나는 일이다. 유리한 건 남기고 불리한 건 애써 지우려는 심리가 ‘선택적 기억상실’로 나타난다.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김기춘, 윤전추를 비롯한 많이 이가 현재 겪고 있다고 의심되는 증상이다. 이들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국민들은 “기억하기 싫다”로 듣는다. 모든 진실이 드러날 즈음 ‘선택적 기억 거부 증후군’이라는 신조어가 나올지 모르겠다.

나현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