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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수용 정치에 휘둘린 한·일 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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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12·28 한·일 위안부 합의를 사실상 원점으로 돌리자는 자극적인 목소리가 9일 야권에서 불거져 나왔다.

트럼프·푸틴에 치인 아베
자국 여론 무마하려 초강경
우상호 “10억엔 돌려줘라”
조기대선 겨냥 자극 발언
합의 깨면 외교신용 파탄 우려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원내대표는 이날 오전 당 최고위원 회의에서 “소녀상에 딴죽 거는 아베에게 10억 엔을 되돌려주라”고 말했다. 같은 당 추미애 대표도 “국민은 정부의 (대일) 저자세 눈치 외교에 굴욕감과 자괴감을 느끼고 있다”고 거들었다.

세 시간 뒤 나가미네 야스마사(長嶺安政) 주한 일본대사가 김포공항을 통해 출국했다. 비행기 탑승 전 나가미네 대사는 굳은 표정으로 “(부산) 소녀상 설치는 매우 유감”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8월 부임 때 밝은 표정으로 “일·한 관계 개선에 매우 큰 기대감을 갖고 있다”고 말했던 그의 표정은 5개월 만에 정반대로 바뀌었다. 앞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일본은 10억 엔을 이미 출연했다”(6일 녹화한 NHK ‘일요토론’)면서 소녀상 철거 압박의 하나로 나가미네 대사의 본국 소환을 명령했다.

한·일 양국의 외교 합의를 ‘내수용 정치’가 위태롭게 흔들고 있다. 일본은 연일 강경 카드를 꺼내고 있다. 아베 총리는 이날 나가미네 대사 외에 모리모토 야스히로(森本康敬) 부산총영사도 귀국시켰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직무정지 상황에서 황교안 권한대행 체제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조기대선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정치권만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차기 대선주자들인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와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는 위안부 합의의 폐기 및 차기 정부에서의 재협상을 주장하고 있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역시 지난해 말 위안부 합의와 관련한 중앙일보와 JTBC의 문의에 “(해법을 찾는) 과정의 끝이어서도 안 되고 끝일 수도 없다”고 밝혔다. 문 전 대표는 나아가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 문제도 차기 정부로 넘겨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대선주자들은 위안부나 사드 배치와 관련한 합의를 한국이 뒤집은 뒤의 후폭풍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고 있다.

“한·일 상황 악화시켜선 안 돼…전략채널 가동을”

정부 관계자는 “한국이 위안부 협상을 먼저 파기하거나 사드 배치를 철회할 경우 국제사회에서 완전히 신용불량국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최근 ‘트럼푸틴’(트럼프+푸틴)에 치인 아베 총리의 대응도 자국 여론을 무마하려는 국내 정치용이란 분석이 다. 조기대선 가능성이 거론되는 한국이나, 가을께 중의원 해산과 재선거설이 도는 일본이나 서로에게 강성으로 대하는 것이 국내 정치적으로는 이해가 맞는 구조다.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장은 “한·일 두 나라는 서로 신나게 싸우다가 화해하는 악순환이 상시화됐기 때문에 한국 내 반일, 일본 내 반한 감정을 각각 국내 정치에 활용하려는 유혹이 강하다”며 “양국의 국내 정치는 후과에 대한 계산 없이 눈 감고 섀도복싱을 하는 것과 같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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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총리는 지난달 러·일 정상회담에서 쿠릴열도 4개 섬 의 반환을 논의하려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돌려줄 생각이 없다”는 답에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지난해 11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을 만났을 땐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파기하겠다는 트럼프 당선인의 생각을 바꿔보려다 실패했다.

진창수 세종연구소장은 “한·일 관계에서 가장 문제는 양국의 국내 정치”라며 “대통령 대행 체제인 상황에서 지금의 정책을 뒤엎거나 악화시켜선 안 되고, 일본과 전략적 채널을 가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익재 기자, 도쿄=이정헌 특파원 ijcho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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