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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10억 엔 줬다” 큰소리…공식 반박도 못한 외교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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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8일에도 부산 일본 총영사관 앞 소녀상을 찾는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이날 방송된 NHK 토론 프로그램에서 “한·일 위안부 합의는 한국 정부가 바뀌어도 실행해야 한다. 이는 국가 신용의 문제”라며 서울 일본 대사관과 부산 일본 총영사관 앞에 설치된 소녀상의 철거를 요구했다. [부산=송봉근 기자]

8일에도 부산 일본 총영사관 앞 소녀상을 찾는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이날 방송된 NHK 토론 프로그램에서 “한·일 위안부 합의는 한국 정부가 바뀌어도 실행해야 한다. 이는 국가 신용의 문제”라며 서울 일본 대사관과 부산 일본 총영사관 앞에 설치된 소녀상의 철거를 요구했다. [부산=송봉근 기자]

부산 일본 총영사관 앞 소녀상 설치에 대해 일본이 연일 강공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외교부는 대통령 리더십 공백 속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대응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한국, 정부 바뀌어도 합의 실행해야”
아베, 소녀상 문제 차기 정부도 압박
박 대통령, 2015년 조기 타결 서둘러
일본 요구 ‘소녀상’ 합의문에 들어가
대통령 직무정지 상황 속 여론 악화
외교부, 실질적 대응조치 쉽지 않아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8일 방송된 NHK 프로그램 ‘일요토론’에서 “한·일 간 위안부 합의는 한국 정부가 바뀌어도 실행해야 한다. 이는 국가 신용의 문제”라며 주한 일본대사관과 부산 일본 총영사관 앞에 설치된 소녀상의 철거를 요구했다. “한국이 확실히 성의를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은 성실히 의무를 실행해 10억 엔(약 103억원)을 이미 출연했다”고도 말했다. 나가미네 야스마사(長嶺安政) 주한 일본대사의 일시 귀국, 한·일 통화스와프 협의 중단 등 일본이 취한 조치가 한국의 차기 정부에 보내는 메시지임을 명확히 한 발언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일본이 ‘보복조치’를 발표한 6일 사전녹화됐다.

외교부는 8일 이를 반박하는 공식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외교부 당국자는 “일일이 반응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고민이 깊다. 외교부는 부산 소녀상 설치 직후 “외교공관 보호와 관련된 국제예양(禮讓) 및 관행이라는 측면에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며 사실상 적절치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럼에도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소녀상 설치를 지지하는 여론이 높은 데다 대통령 직무정지 상황이기 때문이다.

나가미네 대사는 9일 귀국할 예정이라고 한다. 본국으로 돌아가 얼마나 머물지가 소녀상 설치로 인한 한·일 갈등의 향방을 가늠하는 척도가 될 것이란 게 외교부의 판단이다. 소녀상을 둘러싼 갈등은 2015년 12·28 위안부 합의 때 이미 예고됐다. 당시 소녀상과 관련한 합의문 내용은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주한 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에 대해 공관의 안녕·위엄의 유지라는 관점에서 우려하고 있는 점을 인지하고, 한국 정부로서도 가능한 대응 방향에 대해 관련 단체와의 협의 등을 통해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국내외 위안부 피해자 지원 단체는 이를 소녀상을 철거하겠단 뜻으로 받아들이고 반발했다.

‘미래세대가 세우는 평화의 소녀상 추진위’가 부산의 일본 총영사관 앞에 소녀상 설치를 추진하기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피해자에게 일본 측의 사죄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안이 제기되자 아베 총리가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2016년 10월)고 말한 것도 위안부 합의 반대 여론에 기름을 부었다.

2014년 4월 위안부 피해 문제 해결을 위한 한·일 간 국장급 협의가 시작될 때만 해도 소녀상 문제는 의제도 아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측은 소녀상 문제를 꺼냈다. 정부는 그때마다 “소녀상은 협상과 연계시킬 사안이 아니다”고 일축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2015년 6월 미 워싱턴포스트(WP)와의 인터뷰에서 협상의 ‘조기 타결’을 언급하고 정부가 연내 합의를 목표로 속도를 내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당시 사정을 잘 아는 정부 소식통은 “시간이 얼마 없는 상황에서 연내 타결을 하려면 일본이 원하는 소녀상 문제를 서둘러 합의에 넣을 수밖에 없었다”고 전했다.

외교부 안팎에선 이번 사태가 한·일 관계 악화뿐 아니라 한·미·일 공조 균열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아사히신문은 8일 “조 바이든 미국 부통령이 6일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에게 평화적 해결을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총리실 측은 “바이든 부통령과의 통화 자체가 이뤄진 적이 없다”고 밝혔다. 외교부 관계자는 “바이든 부통령은 아베 총리와 통화하면서 일본 측의 강경한 조치에 우려를 표하는 데 방점을 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일본 언론은 다른 방향에서 보도하고 있다”며 일본의 언론 플레이를 우려했다.

손열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는 “위안부 합의에 반대하는 국내 여론 설득이나 부산 소녀상 문제에 정부가 안일한 측면이 있었다”며 “과거사 문제엔 일본이 원하는 최종적 해결이 되려면 더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경제 트랙에선 협력을 설득해야 한다”고 말했다.

도쿄=이정헌 특파원,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사진=송봉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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