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야 황당<황정수 고려대교수·사회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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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서로 마주 보며 달리는 두개의 기관차」에 비유되었던 한국의 정치 상황은 지난 6월 하순을 고비로 극적인 반전을 하면서 「민주화를 향해 같은 방향으로 달리는 한개의 기관차」로 바뀌게 되었다.
이와같은 전환은 외신들에 의해 정치적 기적이라고 불렸고, 그와같은 기적을 실현한 한국국민들의 성숙성에 대해 많은 찬사가 주어겼다. 또 이러한 민주화의 진전과 관련해 많은 사람들은 한국사회에 있어서의 중산층 성장에 크게 주목하고 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군중 시외에 중산층이 참여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뿐 아니라,중산층은 과격한 시위와 폭력을 견제하는 성숙성을 발휘함으로써 정치 위기가 평화적으로 수습되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분석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같은 분석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한국에 있어서의 민주주의를 실현시키는데 기여해 봤고, 또 앞으로도 기여해 나갈 사회적 기반을 지나치게 중산층 중심으로 평가하는 것은 피상적인 관찰의 결과라고 말할수 있다.
우선 한국의 중산층은 산업화와 도시화및 생활 수준과 교육 수준의 향상에 힘입어 크게 성장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그 규모는 전체 국민의 30∼40%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대부분 사회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그러나 자신을 중류계층으로 귀속시키는 이른바 중류의식을 소유한 국민들의 비율은 이미 70∼80%에 이르고 있다는 점도 또한 부인할수 없는 명백한 사실인데, 그와같은 중류층속에는 말할 필요도 없이 농민층과 근로자층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현대 한국사회에 있어서 자유민주주의클 지지하고 민주화를 열망하는 사회 계층도 역시 노동자·농민·자영업자·화이트 칼러를 모두 포함하는 광범한 시민 계층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모든 시민 세력이 다함께 민주화의 기적을 성취한 것이지, 화이트 칼러나 자영업자를 중심으로 하는 경제적 의미의 중산층이 결정적 역할을 한것으로 과대평가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한 것이다.
실제로 여러 사회조사의 결과들을 보더라도 민주화에의 요구에 있어서 중산층과 근로자층 사이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뿐만아니라 분배의 평등이나 사회 정의 실현등과 같은 사회적 개혁에의 요구나 정치및 경제적 영역에 있어서의 도덕성을 촉구하는 의식에 있어서는 중산층이 대부분의 근로자층보다 더욱 적극적인 것으로 보고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같은 사회의식에 있어서의 작은 차이도 사회 경제적 지위변수보다 교육변수에의해 주로 설명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에 있어서 민주세력의 형성은 직업·소득·재산등에 의해 규정되는 중산층에 기반을 두고 있다기보다 비교적 동질적인 정치의식과 사회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광범한 시민 계층에 기초하고 있는것으로 보아야할것이다.
이와같은 넓은 의미에 있어서의 중류계층, 즉 광범한 시민 계층은 이제 적어도 권위주의적인 정치체계를 완강히 거부할 정도의 성숙성에 도달한것으로 보인다.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교육수준을 가지고 있는 한국의 시민계층은 이제는 어떠한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고 권위주의적 정치질서를 배격하는 신념과 능력을 갖추게 되었을뿐 아니라 민주적인 개혁을 추구함에있어 과도한 폭력이나 급진성을 견제할 신념과 능력도 함께 갖추게 된것으로 분석된다.
이와같은 현상은 한국의 정치문화와 시민문화가 상당한 정도의 진전을 이룩한 것을 말해주는 것이며, 그러한 정치문화와 사회세력을 기반으로해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결국 착실히 뿌리를 내리게 될것이라고 전망할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민주주의가 아직도 넘어야 할 많은 난관들을 남기고 있다는 것도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다.
이제 정치인들에게 맡겨진 민주화의 과제를 과연 그들이 어떻게 수행해나갈 것인지에 대해서도 국민들은 아직 경계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또 오랫동안 억제되었던 다양한요구들의 분출을 정치 체계가 어떻게 효과척으로 수용해서 민주적인 개혁을 진전시켜 나갈 것인지도 쉽지않은 과제인것이 분명하다.
분단의 현실과 그로인해 고착된 냉전논리에 의해 비교적 경직되어 있던 이념 구조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의 개방성과 유연성이 필요해지겠지만, 그것도 혼란과 갈등을 야기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진전시켜 나가야할 어려운 과제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민주주의가 이제 광범한 시민 계층을 기반으로한 확고한 사희세력을 토양으로해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이제 무엇으로도 돌이키지 못할 역사적 진로가 이미 열리게 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것을 신봉하고 실천하고 지켜낼수 있는 시민세력에 의해서만 성숙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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