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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이야기 해줄까 #7. 밤의 하얀 집 - 이야기 예술사 (3)

중앙일보

입력

창문을 열자 온통 잿빛이었다. 금세 눈이 쏟아질 날씨였다.
마당 의자에 앉은 안나 이모가 보였다.
가지런한 정수리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그녀는 긴 삶의 과정을 몇 년 사이에 살아내 버린 들판의 나무 같다. 시간이 흐를수록 등이 동그랗게 변하고 허리에는 두툼하게 살이 실렸다. 눈동자에 남아있던 푸른빛도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엄마는 그 푸른빛을 무언가를 향한 열정이라 말했더랬다.
줄기만 남은 담쟁이덩굴이 흔들리는 소리가 이층 내 방까지 들려왔다.
바이바이 바는 안나 이모의 엄마가 유일하게 남긴 유산이었다.
여배우로 살기 위해 떠났던 그녀는 담쟁이덩굴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녀를 맞은 건 죽은 엄마가 지붕에 매달아놓은 깃대의 하얀 옷일 뿐이었다. 아무것도 없이 담쟁이넝쿨만 바람에 검게 흔들리는 풍경이 서 있었다. 자신에게 남은 게 곳곳에 쳐진 거미줄과 빗물이 스며들어 썩기 시작하는 나무집이라 생각하자 눈앞이 아득해졌다. 종종 얼굴을 비치던 아버지와도 연락이 끊긴 지 오래였다. 남편도 아들도, 그녀와 사랑에 빠졌던 낙엽 같은 수많은 남자도 바람을 타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들판의 사자처럼 강해야지.”

안나 이모는 자신과 담쟁이덩굴 집의 조우를 들려줄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내 눈에 비친 그녀는 사자가 아니라 군데군데 가지가 잘려나간 오래된 나무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오랜만에 공연을 볼 생각이었다.
공연이 있는 날이면 관객들 사이에 섞여 접시의 과자를 집어먹거나 우유를 마셨다. 누구도 나를 어린아이로 대하지 않았다. 아무 때나 계단을 내려가 바에 드나들었다. 그것은 자, 이제 눈감고 자야지, 라며 밤마다 눈꺼풀을 손으로 쓸어내렸던 엄마와는 다른 세계였다.
눈길을 빠르게 잡아당겼던 것들은 그만큼 빠르게 멀어졌다.
점점 금지하지 않는 어른들 세계가 지겨워졌다. 나는 그들이 떠난 동그란 홈이나 뿌연 불빛이 떠다니는 공간에 흥미를 잃었다.
언제나 그랬듯 이야기 공연은 늦은 밤에야 시작되었다.
테이블이 다섯 개인 바이바이 바에 모인 사람은 모두 여섯 명뿐이었다. 그들은 매번 술을 마시거나 뜨거운 홍차를 홀짝거렸다.
안나 이모가 뿌연 조명을 받으며 마이크 앞에 섰다.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그녀가 유일하게 온순해지는 순간이었다.

“별이 보이나요?”

“아니오.”
손님들이 합창을 하듯 큰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눈을 비벼요.”

안나 이모가 말했다.
그녀가 처음부터 이야기 예술사라 불린 건 아니다. 한동안은 자기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바이바이 바에서 몇 곡의 노래를 부르는 가수로 살았다. 긴장을 풀기 위한 짧은 이야기들이 엉뚱하게 노래보다 인기를 끌었다. 누군가 당신 이야기 자체가 예술이네, 라는 말을 무심결에 했고, 또 누군가 삶의 무늬를 이야기로 직조해내는 예술사 같다고 덧붙였다. 그런 과정으로 이야기 예술사란 이름을 얻었다.
어떤 일이든 재밌게 들려줄 줄 아는 사람이 바로 안나 이모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라면 언제나 귀를 쫑긋 세우게 된다. 타이가 숲에 사는 바예스타예프는 매번의 이야기 속에서 우스꽝스러운 춤을 춘다. 운석을 팔지 않는 바예스타예프의 할머니도 마찬가지다.
이야기에는 어떤 흐름이라는 게 있어서 그걸 놓치면 청중은 돌아서는 법이라 안나 이모는 말했다. 자기만의 방식이 있어야 하는 거라고도 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안나 이모가 말한 세계가 정말 궁금해졌다. 그것은 책을 읽을 때와는 또 다른 호기심이었다. 나는 공연 때마다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럼에도 그녀의 말을 끝내 이해할 수 없었다. 몇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한 것 외에는 아무런 결과물도 없다.
안나 이모는 누군가 하품을 하거나 진중하지 못한 태도를 보일 때면 새로운 이야기를 끼워 넣는다. 이게 끝인가 싶을 때 무언가 다시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괴상한 표정과 몸짓으로 사람들을 웃겼고,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에 놓인 징검다리에서 청중들은 자세를 고치거나 흐트러진 시선을 한곳으로 모았다. 그런 순간을 놓치지 않기에 그녀의 얼굴엔 조금은 고독하고 지친 빛이 실려 있었다.

오늘 무대에 선 안나 이모는 검은색 긴 드레스 차림에 머리를 틀어 올렸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가 바이바이 바 안을 천천히 맴돌았다.
이야기는 영화배우를 그만둔 후 무대에서 떠나온 과정을 그린 것이었다.
안나 이모 입으로 직접 듣는 것은 처음이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동안은 늘 푸른빛 눈동자의 여배우가 사랑했던 남자들이 등장했다. 어떤 날엔 그녀의 엄마와 아버지가 주고받았던 뜨거운 역사가 그려지기도 했다. 아버지도 엄마를 사랑했지만 결국은 떠나버린 남자 중 하나였다.
안나 이모는 자기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남자들이 떠나는 이유를 고독해서라 했다. 충동적이고 예민하게 반짝거리는 상대를 향한 끝없는 배려가 절망스러워서였다. 함께였지만 무언가 비어있는 공간이 채워지지 않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아무리 많은 책을 읽어도 알아내지 못할 세계였다.

나는 마이크로 전해지는 안나 이모의 숨소리를 따라 숨을 쉬었다.
이야기 속 주인공은 더 이상 아름다운 여배우도, 사람들 중심에서 반짝거리는 별도 아니었다. 내 눈앞에서 그녀는 자신에게 온 두 번째 풍경을 아름답지도 가볍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간간이 농담 같은 게 섞였다. 그때마다 청중들은 휘익, 휘파람을 불거나 큰소리로 웃었다.
영화 무대에서 밀려나와 이야기 예술사로 살아가는 과정을 농담 섞어 풀어내는 안나 이모가 미웠다. 황량한 들판의 나무처럼 몰락한 여배우로 남은 그녀가 초라하고 비참하기만 했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나, 둘, 셋.
나는 안나 이모와 눈이 마주친 동안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기에 아주 천천히 세어야 했다. 초라한 그녀에게 냉정하게 돌아서는 뒷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등을 획 돌려 이층으로 나 있는 계단을 빠르게 올랐다. 발이 닿을 때마다 나무계단이 뒤틀리며 비명을 질렀다.
창문 밖에서 바람이 눈을 휘모는 소리가 들려왔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기면, 엄마의 아무것도 실리지 않은 눈동자가 떠오르는 순간이 찾아왔다. 나는 밤새 뜨거운 물에 목까지 담그고 있는 꿈을 꾸곤 했다. 깨어보면 등과 손바닥이 눈물이 고인 듯 축축했다.

 *

“차차, 뭘 그렇게 꾸물대는 거냐?”

안나 이모가 소리를 질렀다.

‘널 초대하는 거란다.’

지난밤 그녀는 설핏 잠이 든 내게 귓속말을 했다. 어쩌면 그동안 말해주지 않았던 비밀일지 모른다 생각하며 나는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곰도 너보다는 빠르겠다. 나무늘보도 너보다는 빠를 거야. 세상에서 너처럼 느린 아이를 찾는 것도 쉽지 않겠지.”

통통 발소리를 내며 계단을 내려가는데 안나 이모가 소리를 질렀다. 담배연기를 허공으로 계속 불어 올린다. 손을 휘둘러 연기를 흩뜨리자 그녀가 입을 삐쭉거렸다.
안나 이모는 구두를 벗고 맨발로 마당을 앞서 걸었다. 나는 동그랗고 하얀 발뒤꿈치를 바라보며 따라 걸었다.
우리는 기차를 탔고 멀지 않은 역에서 내렸다.
늦은 오후의 겨울 하늘은 차고 맑았다. 눈을 크게 뜨면 아주 먼 곳의 별까지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커다란 가방을 멘 안나 이모가 또 앞서 걷기 시작했다. 나는 담쟁이덩굴 집에 올 때처럼 종종거렸다. 눈앞에 보이는데도 벌써 발끝까지 그녀가 그리워졌다.
얼마나 그렇게 걸었을까, 안나 이모가 작은 극장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내가 잘 따라오는지 상관도 없이 스며들 듯 건물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나는 종종거리며 그녀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출연자 대기실 문을 열자 담배연기가 가느다란 선을 이루며 얼굴로 달려들었다. 중앙에 놓인 장작 난로 위에서 커다란 주전자가 하얀 수증기를 뭉글뭉글 뿜어 올렸다. 커피를 마시거나 대본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에게 안나 이모가 인사를 건넸다. 모두 진한 화장을 한 얼굴이었다. 다들 비슷하게 생긴 모습이라 나는 어깨를 조금 떨었다.

“한눈팔면 안 돼. 사랑은 그럴 때 달아나는 거란다.”


작가 소개    
동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9년, 단편 『아칸소스테가』로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등단.
창작소설집 『마리 오 정원』
테마소설집 『2012신예작가』
12월 테마소설집 출간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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