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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에 발목 잡힌 도시바 ‘정크본드’ 수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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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1989년 7월. 일본 도시바가 발표한 ‘다이나북(Dynabook)’은 세계를 흥분시켰다. 당시에는 획기적이었던 2.7㎏의 초경량에 10MHz라는 최고 속도의 인텔 8086 프로세서, 640×400 해상도의 디스플레이, 1MB의 메모리를 장착한 현대화된 최초의 노트북PC였다. 도시바는 1980~90년대 초까지 TV와 냉장고 등 생활가전부터 PC·반도체 부문까지 세계 가전시장을 호령했다. 그러나 글로벌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28일(현지시간) 도시바의 신용등급을 기존 ‘B3’에서 ‘Caa1’로 한 단계 낮췄다고 밝혔다. Caa1은 무디스가 투자부적격으로 규정한 11개 등급 중에서도 꼴찌에서 5번째 등급이다. 세계 최고의 기업이 27년 만에 부도 위험이 매우 높은 ‘정크본드(쓰레기채권)’로 전락한 셈이다.

무디스는 이같은 조치가 도시바의 단기 유동성 악화와 주식 급락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27일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도시바가 미국 원자력 발전 사업에서 1000억 엔(약 1조350억원) 규모의 특별손실을 입어 올해 회계연도(2016년 4월~2017년 3월)에 반영할 전망이라고 보도했다. 이 보도가 나온 날 오후 도시바는 손실 규모가 수천억 엔(수조원)에 달할 수 있다고 공식 발표했다. 지난해 11월 터진 부실회계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서 또다시 시련을 맞은 것이다. 도시바의 미국 자회사 웨스팅하우스가 지난해 말 CB&I란 미국 원자력 서비스업체를 인수했는데 그 자산 가치가 도시바가 계상했던 것보다 무려 2600억 엔 이하인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서 수조원대 손실 주가 급락
무디스, 11개 등급 뒤에서 5번째
90년대까지 세계가전 호령한 거인
변화에 둔감, 회계부정 겹쳐 추락

문제는 원자력 사업이 메모리 사업과 함께 도시바를 지탱하고 있는 양대 핵심 기둥이라는 점이다. 가전 명가 도시바에는 더 이상 가전사업이 없다. 지난해 터진 회계스캔들이 결정타였다.

※2015년 회계연도는 2015년4월~2016년 3월 자료:도시바

※2015년 회계연도는 2015년4월~2016년 3월
자료:도시바

도시바는 2008~2014년 전·현직 사장 3명이 분식회계로 2248억 엔(약 2조4000억원) 규모의 이익을 부풀린 사실이 적발됐다. 이로 인해 일본 역사상 최대 규모인 73억7350만 엔(약 765억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당시 닛케이는 “달성할 수 없는 목표가 하달되면 하부조직에서 금액을 부풀리는 방식으로 회계조작이 자행됐다”며 불법을 저질러서라도 목표 달성을 강요하는 도시바의 조직 문화를 꼬집었다.

위기에 둔감했던 것도 패인이다. 도시바는 2000년대 중반부터 냉장고·세탁기 등 생활가전 분야에서 한국과 중국기업들에게 밀리기 시작했지만 사업 비중과 생산방식을 고수했다. 생활가전에서 20%에 가까운 영업손실이 나는데도 이를 반도체 부문에서 난 이익으로 돌려막아왔다. 과거 영광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 결과는 처참했다. 도시바에 따르면 2015년 회계연도(2015년 4월~2016년 3월) 순손실만 4600억 엔(약 4조7733억원)에 달했다. 전년도 378억엔 순손실보다 훨씬 불어난 수치다.

※2015년 회계연도는 2015년4월~2016년 3월 자료:도시바

※2015년 회계연도는 2015년4월~2016년 3월
자료:도시바

벼랑 끝에 몰린 도시바는 지난해 말부터 그룹 해체 수준의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올 초 주력이었던 생활가전 사업을 중국 메이더에 매각했고 의료기기 사업은 일본 카메라 업체인 캐논에 팔았다. 도시바를 ‘첨단기업’ 반열에 올려놓았던 노트북·컴퓨터 부문은 일본 후지쓰, 바이오(Vaio)와 통합해 운영하는 방안을 논의했지만 결렬됐다. 그나마 수익원이었던 반도체 역시 메모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팔고 원자력과 메모리 부문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그러나 미국 원전사업 손실이 발표되면서 도시바의 재건은 큰 타격을 받을 위기에 놓였다. 재무건전성을 나타내는 도시바의 자기자본비율은 7%대로 제조업 건전성 기준(20~30%)을 크게 밑돈다. 이번 사태로 자기자본이 줄어들면 시장에서의 신용에도 악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당장 도시바 주가는 26일 443.1엔(종가) 이후 41.6%가 빠져 29일 258.7엔을 기록했다. 사흘 만에 시가총액 7876억엔(약 8조1681억원)이 날아갔다.

도시바는 일단 올해 메모리 반도체에서 흑자를 본 만큼 이를 기반으로 경영 재건에 박차를 가할 계획이다. 그러나 닛케이는 “반도체와 함께 사업 기둥을 이루는 원자력사업이 실적 회복에 찬물을 끼얹었다”며 “도시바가 원자력 사업의 분사도 구상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날 ‘도시바 쇼크’에 일본증시 닛케이225 지수는 전날보다 1.32% 떨어진 1만9145.14를 기록했다. 몬지 소이치로 다이와 투자신탁 경제조사부 부장은 “도시바 쇼크를 계기로 외국인 투자자들의 불신이 높아지면 내년 초 외국인 투자자 매도세가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소아 기자 ls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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