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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 정부로 넘어간 국정교과서…“사실상 폐기 수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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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이준식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27일 정부세종청사에서 브리핑을 통해 “안정적인 교육이 이뤄질 수 있는 방법이 국정교과서 1년 유예 후 국·검정교과서 혼용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세종=프리랜서 김성태]

이준식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27일 정부세종청사에서 브리핑을 통해 “안정적인 교육이 이뤄질 수 있는 방법이 국정교과서 1년 유예 후 국·검정교과서 혼용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세종=프리랜서 김성태]

정부가 내년부터 모든 중·고교에서 국정 역사교과서를 사용토록 하려던 계획을 철회했다. 적용 시점을 2018년으로 1년 유예하고 이때부터 각 학교가 국정· 검정교과서 중에서 선택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교과서의 운명을 차기 정부로 넘긴 셈이어서 일부에서는 사실상 폐기 수순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교육부, 내년 시행 철회 공식 발표
시행 1년 유예하고 국·검정 혼용
희망 학교 있다면 내년에 시범 사용
‘금지법’ 통과 땐 조기 폐기 가능성

교육부는 27일 이 같은 내용의 ‘올바른 역사교과서’(국정교과서) 현장 적용 방안을 발표했다. 우선 내년엔 현행대로 각 학교에서 기존 검정교과서를 사용하게 된다. 단 내년에도 국정교과서 사용을 희망하는 학교는 ‘연구학교’로 지정해 시범 사용토록 할 방침이다. 2018년엔 학교가 국정과 검정 중에서 교과서를 선택하는 ‘국·검정 혼용’을 추진한다. 이에 따라 출판사들은 2018년부터 중·고교에 적용될 새 교육과정(2015 개정 교육과정)에 맞춰 새 검정교과서를 만들어야 한다.

교육부는 또 국·검정 혼용을 위해 시행령도 바꾸기로 했다. 현행 교과용 도서에 관한 규정(대통령령)에 따르면 국정교과서가 있으면 반드시 국정만을 써야 한다. 교육부는 규정을 개정해 국정과 검정을 함께 쓸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또 검정교과서 개발 기간을 최소 1년6개월에서 1년으로 단축해 2018년 3월까지 개발할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

교육부가 국정교과서 강행 방침을 철회한 것은 반대 여론 때문이다. 이준식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이날 “국민·국회·교육감·시민단체 등의 의견을 종합적으로 고려했다”며 “ 교육 현장에서 혼란이 있어선 안 된다는 생각으로 (1년 유예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교육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애써 개발한 교과서를 당장 폐기할 수도 없고, 국민과 정치권 반대를 무시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나온 고육책”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혼용을 하면 국정교과서가 검정교과서와 경쟁하면서 교과서 질도 높일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도 반영됐다”고 덧붙였다.

교육계에선 사실상 폐기 수순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야당은 물론 여당에서조차 국정교과서에 대한 반응이 부정적 이기 때문이다. 김동석 한국교총 대변인은 “학교 현장의 논란을 고려해 고심 끝에 내린 결정으로 평가할 만하다”면서도 “공이 차기 정부로 넘어간 만큼 정권 교체 시 자연스럽게 국정교과서는 폐기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정교과서가 ‘조기 폐기’될 가능성도 열려 있다. 국회에 계류 중인 ‘국정교과서 금지법(역사교과용 도서의 다양성 보장에 관한 특별법)’이 내년 2월에 통과될 수 있어서다.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 소속 야3당 의원들은 이날 “(교육부 발표는) 사실상 국정화를 강행하겠다는 꼼수”라며 “국정교과서 금지법을 신속하게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학교로 선택권이 넘어간다고 해도 학교들의 외면으로 국정교과서 보급이 난항을 겪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그동안 국정교과서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박재련 대한사립중·고교장회장도 “강제가 아닌 선택이라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굳이 써야 하느냐는 학교가 더 많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시범 운영이나 국·검정 혼용이 학교 현장의 혼란만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2014년 뉴라이트 성향 학자들이 집필한 교학사 교과서가 논란을 빚으며 채택률 0%를 기록한 사태가 재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국정화를 비판해 온 한상권 덕성여대 사학과 교수는 “결국 정부가 갈등을 학교 현장에 떠넘겼다고 본다”고 지적했다. 보수진영에서도 비판이 나왔다. 국정교과서를 옹호해 온 이명희 공주대 역사학과 교수는 “정부가 당초 국정교과서 추진의 철학을 주장하지 못하고 여론 눈치를 보다 결국 편법으로 국정교과서를 쓰게 하는 잘못된 방법을 택했다”고 비판했다.

남윤서·전민희 기자 nam.yoonseo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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