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현장에서] 윤이상 100주년에 없어질 위기 몰린 윤이상콩쿠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5면

한국 정신과 서양 음악 기법을 결합시키며 세계적 주목을 받았던 윤이상은 한국에서는 시대와 정권이 바뀔 때마다 평가가 뒤집히고 있다. [뉴시스]

한국 정신과 서양 음악 기법을 결합시키며 세계적 주목을 받았던 윤이상은 한국에서는 시대와 정권이 바뀔 때마다 평가가 뒤집히고 있다. [뉴시스]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는 현재 상황대로라면 내년에 못 열린다. 작곡가 윤이상(1917~95)의 고향인 경상남도 통영에서 2003년부터 매년 열린 대회다. 대회 개최에 4억원이 드는데 경상남도가 2억원, 문화체육관광부가 1억원, 통영시가 1억원을 내왔다.

경남도, 내년 예산 2억 전액 삭감
고향 통영, 100주년 사업 대폭 축소
작고 20년 넘어도 이념 논쟁 시달려
“정치적 배경 있다면 비난 받아야…”

경상남도는 지난달 내년 예산 2억원에 대한 전액 삭감 결정을 내렸다. 국비 1억원도 2014년 5000만원으로 줄었다가 올해 전액 삭감됐고 내년에도 지원은 없다. 이제 이 콩쿠르를 주관하는 통영국제음악재단이 운용할 수 있는 돈은 1억원이다. 사실상 콩쿠르를 못 연다는 뜻이다.

내년은 윤이상 탄생 100주년이다. 윤이상 콩쿠르가 윤이상 100주년에 폐지되는 모양새다. 이 콩쿠르를 처음 제안해 주최한 곳이 경상남도다. 경상남도 문화예술과 담당자는 “내년 100주년 행사와 중복되는 면이 많아 예산담당 부서에서 예산을 삭감한 듯하다. 예산 삭감의 이유까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 것이 관례”라고 설명했다.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는 한국의 첫 국제 콩쿠르다. 전세계에 국제 콩쿠르라는 명칭을 쓰는 대회는 많지만 유네스코 산하의 국제음악콩쿠르세계연맹(WFIMC)에 가입해야 권위를 인정받는다. 우리가 잘 아는 쇼팽·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 등과 한 카테고리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는 2006년 여기에 가입했다. 당시 한국에도 국제 콩쿠르가 생겼다고 감격했던 여론을 생각해보면 이 대회가 갑자기 사라지는 것은 민망한 일이다. 2014년엔 WFIMC 총회도 통영에서 열렸다. 또 병무청은 이 콩쿠르 2위 입상자까지 병역특례를 줘왔다. 손쉽게, 또는 소리소문 없이 없앨만한 대회라고 보기는 힘들다.

콩쿠르 수난사는 윤이상 100주년 사업이 그의 고향에서 겪고 있는 수난사와 맥을 같이 한다. 통영시와 통영국제음악재단은 원래 20억원을 들여 유럽과 한국에서 윤이상 100주년을 기념하려 했다. 60여 명 연주자로 된 앙상블이 유럽 6개 도시를 돌며 윤이상 작품을 연주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경상남도에 신청한 도비 10억원은 나오지 않았고 통영시에서 지급하려던 10억원도 8억원으로 줄어들었다. 순회 공연 도시는 3곳으로 줄었고 연주자도 절반인 30여 명으로 축소됐다.

고향에서 이리저리 상처를 입은 100주년 기념사업은 오히려 수도권에서 추진 중이다. 경기문화재단은 내년 9월 베를린에서 경기필하모닉의 윤이상 공연을 열고 아예 하루를 윤이상의 날로 정하도록 협의했다. 윤이상평화재단은 서울시청 광장에서 윤이상통일음악회를 개최하고 역시 서울에서 심포지엄, 실내악 공연을 열 계획이다. 이를 위해 서울시에 예산 지원을 신청키로 했다.

이용민 통영국제음악재단 예술기획본부장은 “작곡가 윤이상의 100주년 사업과 윤이상국제콩쿠르가 그의 고향에서 수모를 겪는 현실은 비정상적이다. 그 배경에 정치적 판단이 있다면 더욱 비난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윤이상 100주년에 대한 경상남도와 서울·경기 입장의 온도차에서 볼 수 있듯 지자체장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부침을 겪는 윤이상 관련 사업에 관한 발언이다.

윤이상은 1967년 동백림 사건 이후 이념 논쟁에 계속 시달려왔다. 경제학자 오길남에 대한 탈북권유 논란, 북한 정권의 윤이상 추대 때문에 작곡가 윤이상과 그의 작품은 완전한 칭찬도 제대로된 비판도 받지 못했다. 정권의 성향에 따라 윤이상 기념 사업은 갑자기 생기기도, 재빨리 사라지기도 했다. 이 역사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윤이상의 딸 윤정(66)씨는 “아버지가 작고한 지 20년도 넘었다. 탄생 100주년쯤에는 음악만으로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지 않을까 조금이라도 기대했는데 오히려 더 심해졌다”고 안타까워했다. 윤씨의 통영 집 앞은 보수 성향 시위대의 단골 시위 장소다.

지난 13일 경기필하모닉 지휘자 성시연은 기자간담회에서 윤이상에 대한 옛 기억을 들려줬다. “베를린 음대에서 공부할 때 독일 연주자들이 학교에서 윤이상 페스티벌을 열었다. 한국 작곡가 작품으로만 3일동안 공연하는 장면이 놀라워서 모든 음악을 다 들었다. 어린 학생 입장에서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 없었다.” 유럽 음악계 내 윤이상의 위상을 전해주는 말이다. 2017년 윤이상의 고향에서 벌어지고 있는 장면과 20여 년 전 베를린의 장면 중 어느 것이 더 낡은 것인지 분간하기가 힘들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