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엔 멜로디의 달인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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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호 27면

에머슨 사중주단과 메나햄 프레슬러의 드보르작 피아노 오중주.

가을 하늘이 높아지면 드보르작이다. 그의 음악은 바흐나 베토벤처럼 심각한 표정을 짓지 않으며, 말러나 브루크너처럼 우주의 끝을 향하지도 않는다. 술집에서 나는 오래된 발효의 향기처럼 익숙하다. 그는 바그너로부터 시작된 19세기의 음악혁신으로부터 일정 정도 거리를 두었다. 당대 음악계의 보수당 대표였던 브람스는 이런 그를 높이 평가하고 길을 열어주기도 했다. 말하자면 드보르작은 ‘친브계’인 셈이다.


하지만 그가 체코의 국민음악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친브람스계여서보다 조국인 체코의 흙과 땀 냄새를 잊지 않고 음악적 자양분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드보르작은 체코의 시골 마을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푸줏간 주인이었고 여관을 운영했다. 젊은 드보르작은 친척들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음악공부를 할 수 있었고, 이후 작곡가로 성공하기까지 얇은 월급봉투로 가족을 부양하던 생계형 연주자였다. 여기서 오디션 프로그램에나 나올 법한 자수성가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의 진짜 매력은 과연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잠시 생각 끝에 도달한 결론은 그가 최고의 멜로디 메이커였다는 점이다.


피아니스트 러셀 셔먼은 “멜로디는 여왕벌”이라고 말한다. 다른 요소들은 멜로디에 복종하면서 음악을 키워낸다는 뜻이다. 이 말을 그대로 적용하면 드보르작은 당대 최고의 여왕벌 양봉업자쯤 되는 셈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를 예로 들어 보자. 2악장 라르고의 잉글리시 호른 주선율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안다. 초등학교 시절에 ‘미솔솔 미레도 레미솔 미레’로 계이름을 배웠고, 가사를 붙여서 ‘꿈속의 고향’으로 부르기도 했다. 4악장 첼로 도입부는 영화 ‘조스’의 상어 등장 장면을 연상시키며, 이어지는 금관의 호쾌한 주선율은 예전에 프로야구 이종범 선수의 응원가로 쓰이기도 했다.


그리고 작곡가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요즘도 여기저기 술자리에서 흥을 돋우기 위해 쓰인다. “부장님, 노래 나가신다. 빰…빰빰 빰…빠밤.” 음악 애호가가 아니면 좀 낯설지도 모르는 교향곡 8번의 3악장도 아름다운 춤곡의 멜로디가 인상적이다. 언젠가 동유럽 여행 광고 음악으로 쓰일 것이다.


드보르작의 인상적인 멜로디는 교향곡에만 있는 게 아니다. 그의 피아노 오중주 작품 81은 한눈에 반할만한 수려한 멜로디를 가지고 있다. 1악장 도입부부터 귀가 쫑긋 열린다. 피아노의 아르페지오에 이어서 첫 번째 주제가 가을에 어울리는 첼로로 연주된다. 맑은 하늘을 넋 놓고 바라보게 만드는 아련한 선율이다. 한 소절쯤은 따라 부를 수 있을 듯 친숙하다. 첫 번째 주제는 이후 바이올린을 통해 반복되고 곧이어 비올라가 두 번째 주제를 풀어나간다. 실내악의 전통적인 방식을 따라 주제들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악곡이 점점 완성되어 간다.


두 번째 느린 악장은 드보르작의 고유상표인 민요 선율이다. ‘둠카’라는 민속 리듬을 활용한다. 2악장의 멜로디는 안아주고 싶을 만큼 애상적이다. 주제 선율이 장조와 단조로 조바꿈이 일어날 때는 묘한 긴장감이 인다. 마치 둘만 아는 비밀 연애처럼 은밀하다.


처음 이 곡을 접했던 음반은 명연으로 소문나 있는 보로딘 사중주단과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의 라이브 음반이다. 음악을 만들줄 아는 러시아 대가들의 불타오르는 연주다. 작곡가의 정서를 자신들의 화폭에 선명하게 옮겨 놓았다. 특히 2악장에서 리히터의 피아노는 마법에 걸린 듯 환상적이다. 그렇지만 단점도 있다. 뒤마의 소설 『삼총사』에서 함께 싸우지만 결코 사총사가 되어 본 적이 없는 달타냥처럼, 전체적으로 리히터의 피아노가 보로딘 사중주단 앞에 선다. 언제부터인가 리히터의 연주가 부담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들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히려 요즘 더 자주 손이 가는 음반은 에머슨 사중주단과 메나햄 프레슬러의 것이다. 이들에겐 앞선 연주에서 들었던 것처럼 날을 세운 긴장감 같은 것은 없다. 대신 연주자들 사이의 민주적이고 평등한 대화와 적당한 거리감이 있다. 이지적이고 관조적이며 열정을 한번쯤 억누르고 있는 연주인데, 호불호가 나뉜다. 보자르 트리오의 피아니스트 메나햄 프레슬러는 이질감 없이 에머슨 사중주단에 잘 녹아든다. 종종 실내악 협연에서 드러나는 독주 피아니스트와 실내악 피아니스트의 차이가 뚜렷하다. 그의 피아노 음색은 영롱하고 사려 깊다. 그리하여 도시의 엘리트 대학생 같은 에머슨의 이지적인 분위기를 충분히 상쇄해 주고 있다.


잔디밭에 누워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드보르작의 음악을 듣고 싶은 날들이다. 하늘을 마지막으로 바라본 게 언제쯤이었나. ●


글 엄상준 TV프로듀서 90empero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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