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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만드는 것들은 깨달을 수 없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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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4호 22면

일러스트 김옥

“우리는 침대에 누웠다. 30년이나 같이 산 아내를 속일 수 있는 눈빛을 가진 남편과, 30년 가까이 살았는데도 그렇게 속아 넘어갈 수 있는 아내. 우리의 습관 같은 몸짓은 잘 기억하는 옛날 노래처럼 쾌적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자 아무것도 아닌 마지막 떨림에 무릎 꿇으면서 나는 알았다. 잉그리드는 싸우는 줄도 모르는 전투에서 마지막 패배를 거두었음을. 그리고 싸운 적조차 없는 안나가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을.”


싸우기도 전에 미리 패배하는 것. 소설에서 결혼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쓴 적이 있다. 내겐 이 문장이 꽤 오랫동안 결혼에 대한 가장 적절한 정의처럼 느껴졌었다. (루이 말 감독의 영화로 더 잘 알려진) 조세핀 하트의 소설 『데미지』를 읽었을 때, 그 확신이 조금 더 강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의 기저에는 삶이 기쁨이나 행복이 아닌 견고한 고통이나 불행으로 설계되어 있다고 믿는 사람 특유의 시니컬함도 묻어 있었을 것이다.


의사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해 한 치의 오차 없는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던 스티븐 플레밍은 파티에서 우연히 한 여자를 만난다. 그는 첫 눈에 사랑에 빠진다. 그녀의 이름은 안나 버튼. 불행히도 자신의 아들 마틴의 연인이었다. 스티븐이 안나에게 빠져든 건 그가 수십 년간 고수해온 삶의 방식과 무관치 않은 아찔한 낙차 때문이기도 하다.


그를 지금의 성공으로 이끌었던 요소들, 가령 지나칠 정도의 질서정연함, 혼돈을 피하는 능력, 열정보단 냉철한 이성은 미칠 듯한 사랑을 느낀 이 여자에게는 조금도 발견되지 않는 요소였다. 그런 이유로 그는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빠져든다. 지나치게 충동적이고, 감정적이며, 솔직한 안나 버튼은 고대의 연금술사처럼 그를 순식간에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환시킨다.


극렬한 쾌락 뒤를 따라오는 필연적인 고통은 오히려 스티븐에게 사랑에 대한, 정확히 말해 ‘살아있음’에 대한 강한 확신을 불러일으킨다. 관리하고 통제했던 삶은 비로소 꿈틀거리며 살아 숨 쉬는 무엇이 된다. 그렇게 아들에 대한 깊은 죄책감은 효과적인 자기기만과 함께 즉각적으로 휘발된다. 그러나 안나와의 불안한 만남이 이어지던 어느 날, 그는 마틴과 안나의 충격적인 결혼발표를 듣게 된다.


상처 입은 사람은 살아낼 줄 안다루이 말 감독의 영화 ‘데미지’를 이해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조세핀 하트의 원작 소설을 먼저 읽는 것이다. 금기된 사랑을 다룬 이 소설의 미덕은 영화에선 깊이 다루지 않은 주인공의 내면에 대한 세밀한 묘사들이다. 영화 속에선 얼핏 이해 불가능한 팜므파탈인 안나라는 여자는 소설 속의 엄마를 통해, 옛 연인 피터를 통해, 스티븐의 입을 통해 조금 더 입체적으로 그려진다.


“안나는 여러 사람에게 엄청난 아픔을 안겨주었지요. 제 견해로 그 애는 전혀 잘못이 없습니다. 하지만 안나가 재앙의 촉매제이기는 합니다. 마틴은 다를지 모르겠군요. 그는 안나를 내버려두는 것 같아요. 안나에게는 그게 아주 중요합니다. 누군가 제지하려고 들면 안나는 싸울 겁니다. 누구도 안나를 부술 수 없어요. 그 애는 이미 부서졌거든요. 안나는 자유로워야 합니다.”


안나가 ‘이미 부서진 사람’이라는 모친의 말은 그녀가 언젠가 스티븐에게 건넸던 “상처 입은 사람은 위험하다”는 말로 이어진다. 초점 없이 공허한 눈빛의 안나에게는 상처 입은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 특유의 포즈가 있다. 과거 안나는 친오빠를 죽음으로 잃었다. 그녀의 친오빠는 안나를 (여자로)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그녀를 옥죄려 들었고, 결국 그녀를 상처주기 위해 자신의 몸을 찌른다.


안나는 혈육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했던 트라우마 때문에 이후의 삶에서 옭아매지 않는 극도의 자유를 갈망하게 된다. 어린 나이에 친오빠의 자살이라는, 생을 짓누르는 압도적인 죄책감을 경험한 탓에 이후에는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안나의 심리적 방어기제는 그녀에게 오히려 자기 확신과 냉담한 매혹이라는 기이한 훈장을 남겼다.


“안나는 정말 확고하고 강해 보였다. 운명을 안전하게 맡길 수 있는 여신 같았다. 그녀의 결정이 옳고 그녀의 판단이 현명하리라 확신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배신과 기만이 얼룩진 인생 계획을 공모하고 있었다. 그것은 평범하고 잔인한 간통 이상일 뿐 아니라 오랜 금기를 깨는 행위였다.”


스티븐은 그녀를 ‘공모자’라고 믿(고 싶었겠)지만, 실은 그녀가 그를 붙잡아 자신 쪽으로 이끌었다. 그녀는 자신의 문법을 눈빛으로, 몸짓으로, 말로 그의 몸에 새겨 넣은 것이다. 그렇게 결국 자신과 극단적일 만큼 반대의 삶을 살았던 남자에게 확신에 가득 찬 말을 내뱉게 한다. 그것도 30년 이상을 함께 한 아내 앞에서.


“난 바람을 피우는 게 아니야. 몸과 영혼과 마음이 사로잡혀 있는 거지. 내 존재 전체가 단 하나, 안나와 함께하는 시간에 쏠려 있어. 그녀 이전의 내 삶은 잘 먹히는 거짓말이었고, 잉그리드 당신은 그 안에서 맡은 역할을 충실히 했지. 안나 이후의 삶은 그렇지 않을 거야. 그녀 이후에는 삶 같은 건 없을 테니.”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느끼게 해주는 것‘데미지’를 보는 두 번째 방법은 나처럼 20년쯤의 시간 격차를 두고 보는 것이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내 머릿속을 짓누르던 영상은 마틴이 발가벗은 채 아버지와 침대에서 뒹굴고 있는 그녀를 보고 난 후, 뒷걸음치다가 계단에서 떨어지는 장면이다. 마틴은 (뒤로 떨어져서) 머리가 바닥에 짓이겨진 채 즉사한다. 스티븐은 알몸으로 계단을 뛰어 내려와 죽은 아들을 끌어안고 오열한다. 어떤 식으로도 멈춰지지 않던 그 사랑은 아들의 죽음과 함께 끝장나 버린다. ‘데미지’를 처음 보던 밤, 나는 지독한 악몽을 꿨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뭔가 끝없이 구토하는 꿈이었다.


대개 신화에선 아들이 아비를 죽인다. 오이디푸스는 아비를 죽일 것이란 신탁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버려진다. 하지만 이 영화 속에선 아버지가 결국 아들을 죽인다. 이 역전된 신화가 말하고 싶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유능한 늙음이 무능한 젊음을 살해하는 것? 당시 대학생이었던 내가 이 영화 속에서 본 건, 젊음이라는 가능성 이외에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고,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나 자신의 모습이었다. 어쩌면 떨어져 죽은 아들의 짓이겨진 머리에서 나는 내 모습과 함께 사랑의 비이성적 공포를 함께 느낀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긴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영화를 봤을 때, 나를 이끌었던 건 마틴의 충격적인 죽음이 아니라, 안나의 모호한 얼굴과 스티븐의 마지막 독백이었다. 모든 걸 잃고 세상을 떠돌던 스티븐이 깨닫게 된 건, 한때 자신의 뮤즈이며 전부였던 안나가 아이를 안고 있는 그저 평범한 여자였다는 사실이었다.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깨달음의 정의는 무수히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주는 깨달음의 가장 큰 깨달음은, 그것이 언제나 뒤늦게 찾아온다는 것이다. 아들의 죽음과 이혼, 해고, 절망이라는 연쇄적인 사건 그 이후에 말이다. 그러므로 맨발의 남자가 낯선 타국의 좁은 방에 서서 창밖을 내다보며 할 수 있는 말 역시 이런 것이다.


“세상에서 사라지는 건 정말 순식간이다. 난 내 인생을 찾을 때까지 여행을 했다. 인생을 만드는 것들은 깨달을 수 없다. 아는 것 이상이다. 우리가 사랑에 굴복하는 건 우리가 알 수 없는 뭔가를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 이외의 것들은 무의미하다.” ●


백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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