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재단 출연금 용처, 국민과 소통해 결정해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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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2호 2 면

일본 정부가 한·일 위안부 협상 합의에 따라 세워진 ‘화해·치유재단’에 약속했던 10억 엔(약 108억원)을 신속하게 출연키로 한 것은 늦었지만 다행한 일이다.


외교부는 지난 12일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외상이 윤병세 외교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와 이같이 밝혔다고 전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이 일본 우익세력의 요구에 굴복해 출연금 제공 조건으로 주한 일본대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 이전을 내세웠다면 지난해 맺은 12·28 위안부 합의는 공염불이 됐을 것이다. 지난해 체결한 합의문에는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에 대해 공관의 안녕·위엄 유지 관점에서 우려함을 인지하고 대응방향에 대한 관련 단체와의 협의 등을 통해 (이 문제가)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한다”고 돼 있다. 어딜 봐도 소녀상 이전이 출연금 제공의 전제조건이란 내용은 없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자국 내 우익들의 주장에 편승해 소녀상 이전을 압박하면서 출연금 지원을 미뤄 오다 71돌을 맞는 8·15 광복절을 사흘 앞두고야 ‘무조건 지원’ 입장으로 선회한 것이다. 만시지탄이지만 일본의 이 같은 자세 전환을 환영하며 재단 설립과 출연금 용처 등 향후 이행 절차가 당초 설립 취지에 맞게 차질 없이 진행되도록 양국은 외교적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번 출연금 지원을 계기로 일본은 위안부 희생자들의 자존감과 명예를 훼손하는 언행이 재연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길 기대한다. 기시다 외상은 윤 장관과의 통화 후 일본 기자들에게 “앞으로도 (소녀상 문제에 대해) 적절한 해결을 요구할 것”이라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소녀상 철거 문제는 일본 외상의 주문이나 요구에 의해 해결될 성질이 아니다. 그런 만큼 소녀상 문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할 게 아니라 재단 출연금 지원을 계기로 위안부 할머니들의 상처가 치유되고 명예 회복이 이뤄질 수 있도록 진정성을 보여 줌으로써 마음으로부터의 용서와 화해를 얻도록 노력하길 기대한다.


출연금 사용처 문제도 뇌관이 될 수 있다. 일본 내 일각에서는 ‘미래 지향적’이란 명분 아래 “일본어를 배우려는 한국 유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쓰자”는 이야기까지 나온다고 한다. 재단 이름에서 나타나 있듯 지난 위안부 합의의 근본 정신은 화해와 치유다. 일단 위안부 할머니들의 상처에다 우리 민족의 자긍심이 입은 상흔을 치유하고 보듬은 뒤 진정으로 화해하고, 그럼으로써 앞날을 이야기하는 게 순리다. 이런 마땅한 절차를 무시한 채 느닷없이 향후 협력 방안부터 실행하자는 일본 측 주장은 한국인들의 정서상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양국 정부는 이 점 역시 명심해 재단 출연금 사용의 구체적 항목을 결정해야 할 것이다.


양국 정부가 진정성을 갖고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한다면 일부 못마땅한 점이 있더라도 우리 사회가 이를 전향적으로 바라보는 자세도 필요하다. 지난해 12·28 위안부 합의에 대해 야당과 일부 시민단체에서는 일본 정부의 진정성 있는 사과와 법적 배상 등이 이뤄지지 않았다며 전면 무효화 및 재협상을 요구하고 있다. 그간 위안부 할머니들이 겪었던 말 못할 고통을 생각한다면 이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되고도 남는다. 하지만 우리를 둘러싼 국제정치의 냉엄한 현실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현재 한·일 관계는 위안부 문제 외에도 교과서 왜곡 문제, 과거사 분쟁, 독도 등 영토 문제까지 겹쳐 얽힌 실타래처럼 꼬여 있다. 국내에선 야당과 시민단체가 위안부 협상에 대해 정부를 비판하고 있고, 일본에선 극우파를 주축으로 아베 정권에 더욱 강경하게 나가라고 압박하고 있다. 이 바람에 양국 국민 감정까지 악화될 대로 악화된 상황이다.


또 북한 핵 위기가 갈수록 고조되고 있고,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문제로 중국과의 갈등이 확대되고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의 국제정세를 둘러볼 때 일본과 강 대 강으로 대치하는 것만이 우리의 국익을 위해 바람직한 것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번 사드 사태에서 목도했듯 중요 현안에 대해 국내에서 국론이 분열돼 대외적으로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따라서 출연금 용도 문제 등에 있어서도 각계 의견을 충분히 수렴한 뒤 신중하게 결정할 필요가 있다. 당국은 지금부터라도 좁게는 당사자인 위안부 할머니들, 넓게는 국민과 폭넓게 소통함으로써 모처럼 조성된 화해 분위기를 발전적으로 이끌어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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