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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트가 매너를 만들진 않더라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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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7호 29면

얼마 전 서울에 있는 한 특급 호텔에서 있었던 일이다. 예정된 인터뷰 시간보다 1시간 30분이나 일찍 도착해버린 터라 시간을 보낼 장소가 필요했다. 일단 1층 로비 카페에 앉기로 하고, 어느 테이블이 좋을지 살짝 고민했다. 카페가 워낙 넓은 데다 메인 홀에서는 실내악 라이브 공연이 한창이었기 때문이다. 연주 소리가 너무 커서 함께 간 사진 기자와 대화가 어려울 정도였다. 우리는 “이래서야 마주보고도 서로의 목소리가 안 들리겠다” 투덜대며 가장 조용할 법한 구석 자리를 찾았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음악 소리보다 더 짜증나는 소리에 시달려야 했다.


핀 스트라이프가 들어간 카멜 컬러의 슈트를 입은 노신사의 대화가 문제였다. 짙은 갈색 옥스퍼드 구두까지 멋지게 갖춰 신은 노신사는 언뜻 보기에는 완벽한 ‘신사’의 모습이었다. 나이 들어서도 저렇게 슈트가 잘 어울릴 수 있다니, 자기 관리를 참 잘 하는 분이구나 감탄했다.


하지만 그가 입을 열자, 그 근사한 신사의 이미지는 일순간에 날아갔다. 이 분, 하는 말의 모든 시작과 끝이 ‘개XX’‘십X’이다. 왜 그렇게 흥분해서 육두문자를 날려야 하는지 대화 내용까진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튼 노신사는 1시간 넘게 ‘개XX’가 ‘십X’ 하는 이야기를 했고, 옆 테이블에 앉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욕을 고스란히 들어야 했던 우리의 멘털은 너덜너덜해졌다. 저런 옷차림에 거침없이 육두문자를 쓸 수 있는 사람은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일까. 앞자리 남자는 그 노신사를 ‘회장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날의 풍경을 한 컷의 만평으로 표현했다면 아마도 제목은 ‘입에 걸레를 문 회장님’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노(No) 신사!’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 “슈트는 신사의 갑옷.”


지난해 2월 개봉해 누적 관객 수 약 600만명(영화진흥위원회 2016년 2월 17일 집계)을 기록한 영화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의 대사들이다. 두 대사는 다른 상황에서 각각 사용된 것이지만 맥락 상 ‘슈트를 잘 차려입은 신사라면 매너는 기본’이라고 이해됐다.

실제로 옷차림에 따라 행동이 달라지는 것도 사실이다. ‘정봉이 패션’(드라마 ‘응답하라 1988’ 속 캐릭터가 즐겨 입었던 트레이닝복 스타일·사진)을 입고 있다면 행동 역시 자연스레 편안하고 캐주얼하게 변한다. 반대로 몸에 꼭 맞는 슈트를 입었다면 길거리에 그냥 퍼져 앉기란 쉽지 않다. 손에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다니는 것도 어울리지 않을 터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는 건 이 지점이다. 옷차림은 몸을 덮고 있는 껍질 같은 존재다. 개인의 분위기나 취향을 나타내는 도구이긴 하지만 그 사람의 매너까지 담보하진 않는다. 옷차림으로 그 사람의 됨됨이에 대해 편견을 가져서는 안 되는 이유다.


매일 트레이닝복만 입는 정봉이는 ‘응팔’ 드라마 캐릭터들 중에서 가장 여성을 존중하는 남자였다. 나이 어린 고등학생 여자 친구 이름을 부를 때면 언제나 ‘만옥양’이라고 했다. 또 자신보다 훨씬 어린 나이임에도 꼬박꼬박 경어를 사용했다. 어머니에게도 언제나 존댓말을 썼고 소리를 지른다든가 대든 적이 한 번도 없다. 멋도 없고 돈도 없어 보이는 트레이닝복 차림의 정봉이가 ‘입에 걸레를 문 회장님’보다 신사인 이유다.


글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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